책, 조성기 저, “1980년 5월 24일”. 한길사.
깊은 밤의 적요를 뚫고 먼 곳에서 웅웅대며 이어지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강릉에서 우리나라 동해 최북단 고성으로 이어진 고속국도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마을에 3층 이상의 건물은 별로 없었다.
고속국도가 먼 곳에 있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소리는 깊은 밤, 낮은 건물들만 줄지어 있는 시내 중심가를 타넘고 웅웅거리며 계속 들려왔다. 분명 일반 차량은 아니었다. 커다란 바퀴들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빠르고도 무겁게 달려가는 소리였다. 그렇게 한꺼번에 달리는 차량이라면 분명 군용 트럭일 것이었다.
이 깊은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저 많은 차량들이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서워졌다. 얼른 이불을 차고 나가 마루를 건너 안방 문앞에 다다라 똑똑 두드렸다. 너 깼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그 소리에 깨어나셨던 것 같았다.
엄마, 고속국도 쪽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차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나는데 들리세요? 그래, 듣고있다. 엄마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했다. 웬만하면 호들갑 떨지 말고 가서 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에 내게 들어오라고 한 것을 보면 엄마도 뭔가가 심상찮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군대가 이동하는 소리같구나. 아버지도 깨어나셔서 한 마디 하셨다. 지금 저 도로를 지나는 차량 소리가 30분도 넘게 계속 들려오는데 그렇다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그래기다 말이다. 지금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소리만 들어도 병력 규모가 엄청난데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구나.
그 소리는 중간 중간 끊어지기는 했지만 잠시 후, 다시 들려왔고, 또 다시 들려왔고 그렇게 새벽 내내 반복됐다. 엄마는 어쩌면 난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6.25 사변을 겪었던 엄마가 말하는 난리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가 함께 주도한 12.12 사태 전야였다는 것은 며칠 후에야 뉴스에서 알게됐다. 12.12사태는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쐈던 10.26 사태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군사 반란이었다.
그 충격적인 기억 때문일까? 나는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인 사실 이외에도 그 주인공이었던 김재규 개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성기 작가가 <1980년 5월 24일>이라는 책을 발간했다는 소식을 김미옥 샘의 게시글에서 읽고 주문했는데 이런 저런 밀린 책들이 많아 미뤄졌다가 다 읽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무척 재미있게,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며 읽었다. 맨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먹먹한 마음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자칫 무겁고 딱딱하게 전개되기 쉬운 역사소설을 현재와 과거를 씨줄 날줄로 교차하며 이렇게 섬세하고 치밀하게 직조해 낸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페친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자…
“1980년 5월 24일
오늘은 내가 사형당하는 날이다.
내가 나를 사형하는 날이다. ”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10.26 사건이 일어난 후, 7 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재판과 사형선고, 사형집행이 논스톱으로 이루어지는 기막힌 스토리의 주인공 김재규, 하지만 그는 아직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정확한 평가가 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100년은 지나야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아직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18년 동안이나 철권통지를 해 온 박정희, 그 밑에서 충성하며 온갖 권력의 부스러기는 다 누리던 김재규였다. 그가 권력의 다툼에서 밀려나자 욱하는 심정과 분풀이로 총을 쏘았다는 주장도 있고, 박정희의 밑에서 민주주의가 말살되어가는 것을 보며 대의를 위해 독재자를 처단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살인자인가?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열사인가?
독자들의 이 의문에 작가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지나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형 집행일에 교도소에서 형장까지 가는 동안의 그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다만 이 작품은 그가 가진 갈등과 고민, 그리고 인간적인 면모는 섬세하게 서술하는데 그것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내가 김재규의 생애와 내면을 통관해보고 내린 결론은 시대의 흐름 자체가 박정희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재규 개인이 박정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박정희를 죽인 셈이다. 그 시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염원이 김재규라는 인물 속에 투입되었고 그는 그들의 의지와 염원을 대리하여 표출하고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의 의지로 그 일이 가능했겠는가. 이 소설을 읽고 덮는 순간 이러한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지금 이 시기의 정치 현황과 관련하여 교훈과 경고를 얻게 된다면 작업한 보람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작가의 이 말은 이 책을 계속 읽어 내려오며 내가 반복적으로 생각하던 답이었다.
요즘과 같은 난세에 참으로 날카롭고도 서늘한 가르침이 아닌가?
[ 22. Juli 2023]
#1980년_5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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