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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암살. 2015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1. 25. 01:24


[암살]'이란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가 크게 조명받고 있음을 본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독립운동가 남자현은 대체 누구인가?
그녀의 별명은 여러개가 있는데  "여성 안중근", "조선의 총구", "변장술의 천재", "세 손가락 여 장군", "독립군의 어머니" 등의 별명이  있다.  

그런데  그가 지린성에 있는 신학교(지금은 그 신학교의 흔적이 없음)를 졸업한 사람으로써 교회를 12곳이나 개척한 전도사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남자현(1872∼1933) 선생은 그리스도교 믿음에 기초한 가치관으로 왜놈들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사신 분인데
최근 무장투쟁가로만 빨갱이라 폄하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영화 <암살>은 최동훈 감독이
9년간 계획하고 만들어낸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여전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며,
더욱 뜻 깊은 영화로 남게 되었다.

이 영화는 2015년에 개봉했는데,
누적 1,270만 6829명을 기록했고
네이버 관람객 평점 9.1을 기록하며
커다란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때는 1933년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측에 노출이 되지 않은 3명을
‘암살작전’에 지목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꼽히는 여성 항일투사 남자현 선생의 증손자 김종식(57) 옌볜과학기술대 교수의 이야기다.
최근 증조모가 활약했던 중국 하얼빈 일대를 방문한 김 교수는 ‘남자현 여사의 믿음 생활’이란 제목의 이메일을 국민일보에 보내왔다.

그는 이메일에서 “영화 ‘암살’로 여성 독립운동가인 증조모가 새롭게 주목을 받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무장투쟁가의 면모만 부각되는 게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다”며 “사람들 대부분은 남편을 잃은 증조모가 ‘여필종부(女必從夫)’ 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남 선생이 조국에 헌신한 이유를 ‘그리스도교 믿음에 근거한 애국심’에서 찾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창천감리교회에서 신도들과 함께 ‘조선독립선언격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한 일,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와 함께 여성계몽·교회개척에 힘쓰며 분열된 독립군을 단합시킨 일 등을 볼 때 남 선생의 그리스도교 믿음과 일본 식민지배에서부터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는 “증조모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차림으로 성경을 들고 자오허 등 지린의 조선인 마을을 찾아가 ‘우리는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이나 전능하신 하느님을 의지해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나라 독립을 위해 마음을 모으자’고 기도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겠다고 나섰다고 한다”며
“특히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이란 찬송을 좋아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즐겨 부르셨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남 선생의 극진한 나라사랑은 조국 독립과 독립군 단합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3번 단지(斷指)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1927년 일제의 밀고로 중국 지린성 당국에 체포된 안창호 등 독립군 지도자 47명을 모두 석방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남 선생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암살에 가담한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에 힘쓴 분이 왜 암살을 3번이나 시도했을까’란 의문을 가졌는데 그분의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며 “증조모는 1925년 서로군정서가 임시정부와 연계한 정의부가 되면서 중앙여성대표가 됐는데 이는 적군을 궤멸하는 독립군부대의 중대장이 된 것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했다.
남 선생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활동가인 동시에 군인으로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암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증조모는 부하의 밀고로 적장 궤멸에는 실패했지만 후손들에게 ‘원수를 용서하고 복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며 “이번 하얼빈 방문 때 우연히 밀고자의 이름을 알게 됐지만 유언을 지키기 위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1987년 한·중 합작회사를 경영하다 1997년 옌볜과기대 한국어과 교수로 초빙된 김 교수는 20년째 중국에 살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조부로부터 증조모의 독립운동 활약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게 중국에 온 계기”라며 “증조모의 독립운동이 재조명받는 것을 계기로
더 많은 그리스도교 선조들의 나라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01. März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