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önigreich Kambodscha. 2004. 2월]
위 치 :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남서부
경, 위도 : 동경 105° 00", 북위 13° 00"면 적 : 181,040㎢
해 안 선 : 443Km
영 해 : 12해리
수 도 : 프놈펜
종족구성 : 크메르족 (90%), 베트남인 (5%), 중국인 (1%)
공 용 어 : 크메르어
종 교 : 소승불교 (95%)
독 립 일 : 1953년11월 09일
국가원수:노로돔 시아모니(Norodom Sihamoni)
국 왕 : (2004. 10. 29 즉위)
총 리 : 훈센(Hunsen) (85. 01. 14 취임)
정 체 : 입헌군주국
통 화 : 리엘(Riel)
인 구 : 13,881,427명(2006)
평균수명 : 59.29세(2006)
출 산 률 : 3.37명(2006)
1인당GDP: $(2006)
실 업 률 : 2.5%(2000)
수출규모 : 억$(2006)
수입규모 : 억$(2006)
정식명칭캄보디아왕국(Königreich Kambodscha, The Kingdom of Cambodia)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 평원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로,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남서쪽으로 시암만(灣:타이만)에 면한다. 국명은 프랑스어(語)인 ''Cambodge''를 영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고대의 캄부자(Kambuja; 앙코르) 왕국에서 유래했다. 1975년에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이 이루어져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행정구역은 20개주(khaitt), 4개 크롱(krong)으로 되어 있다.
1.
캄보디아 자연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평원을 차지하며 메콩강(江)이 중앙을 관류하는 평원국가이다. 지형은 남쪽을 제외한 3방향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산지의 중앙에는 넓은 평원이 전개되어 있어 마치 얕은 대접 모양의 지형을 이룬다. 주위의 산지는 가장 높은 남서부의 카르다몸(크라반)산맥도 해발고도 1,000∼1,500m에 불과하다. 이들 산지는 중앙부를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져 있으며, 서부에서 가장 움푹 팬 부분이 톤레사프(‘큰 호수’라는 뜻)이다. 중앙의 캄보디아평원은 처음에는 해저지역이었으나 충적작용에 의해 평야로 바뀌었고, 해발고도 20m부터 수백m에 이르는 작은 구릉(프놈)이 산재하여 단조로운 평야의 경관을 깨뜨린다. 국토의 약 3/4은 삼림으로 덮여 있다.
북부·서부·남서부의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강은 모두 톤레사프호(湖)로 유입하며 호수의 동쪽 끝에서 톤레사프강이 되어 남동쪽으로 향한다. 동부 구릉의 가장자리로는 메콩강이 흐르며 북동부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지류가 유입된다. 메콩강은 라오스 국경의 콘폭포로부터 캄보디아평야를 남쪽으로 관류하면서 세콩강·세산강의 지류를 합하여 강폭을 넓히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톤레사프강과 합류한다. 갈수기에는 톤레사프호의 물이 톤레사프강으로 흘러 프놈펜 부근에서 메콩강에 합류하고 여름의 용수기에는 프놈펜으로부터 물이 역류하여 호수로 들어가 유량 조절지의 역할을 한다. 톤레사프호의 호안선(湖岸線)은 지도상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넓은 지역까지 확대된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몬순기후로 10월 중순∼5월 초의 건기와 5월 중순∼10월 초의 우기로 나누어진다. 건기는 비교적 서늘한 11∼2월과 더운 3∼5월로 나누어져 앙코르와트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12∼1월에 많다. 강수량은 주변 산지에 많고 몬순의 영향이 미미한 중앙평원에서는 적다. 연평균강수량은 1,000∼1,500mm이나 남서부 산지의 바다쪽 경사면은 5,000mm 이상이다. 따라서 식생은 주변산지에 밀림이 우거져 있을 뿐 다른 지역은 관목과 초원이 혼합하는 사바나의 경관을 이룬다. 중앙평원은 제1의 농업지역으로 대부분은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후가 자연식생에 적합하며 동물로는 코끼리, 야생 물소, 호랑이, 퓨마, 표범, 곰 등과 수많은 작은 짐승들이 있으며 특히 코브라, 왕코브라, 줄무늬크레이트(코브라의 일종), 러셀 등 위험한 독사가 많다.
2.
캄보디아의 주민
캄보디아인(크메르족)이 전 인구의 95%를 차지하며 그밖에 중국인·베트남인(人)·참족(族)·고산족 등이 있다.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중국계는 5.1%를 차지하는데, 출신지는 차오저우[潮州]·광둥[廣東]·푸젠[福建]·하이난[海南] 등이다. 베트남인은 1977년까지 4.5%를 차지하여 어업 외에 목수, 미장이, 이발, 기계수리 등의 기술적 직업에 종사하였으나, 1977년부터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으로 대부분 베트남으로 도피하였다.
이밖에 크메르이슬람이라는 소수의 참인(人)이 어업에 종사하며, 크메르루(상부크메르)로 총칭되는 쿠이족·스첸족·프놈족·자라이족 등 소수민족이 화전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언어는 크메르족이 공용어인 캄보디아어(語)를 사용하며 중국계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나 중국인들간의 공통어로는 광둥어가 우세하다. 50대 이상의 장년층은 프랑스어, 청년층은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3.
종교는 예로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1975년까지 국교였으나 이후 크메르루주에 의하여 취소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 다시 국교가 되었다. 주로 소승불교를 신봉하는데, 모하니가이·도마유츠트의 두 파가 있으나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현재 전 국민의 90%를 소승불교가 차지하며 나머지는 이슬람교(참인)·그리스도교(베트남인)·힌두교 등을 신봉한다. 네아츠크다[精靈]의 신앙, 인도에서 전래된 바라문교가 남긴 주술에 관한 민간신앙도 많이 남아 있으며, 안전을 목적으로 한 부적, 문신(文身)도 행해지고 있다. 폴포트·이엥사리 정권은 종교활동을 금지시키고 사원을 파괴하였으며 승려의 환속을 강요하였다.
[캄보디아의 역사]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올라가 6세기까지 인도문명의 영향 아래 부남(扶南) 왕국이 번영하였다. 부남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이 부남을 병합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8세기 초에는 수진랍(水眞臘)과 육진랍(陸眞臘)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다시 통일하여,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앙코르왕국을 건설하였다.
앙코르왕국은 진랍의 전성기로 12세기 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 인도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등 거대한 건축물이 조영되었다. 이 당시 앙코르의 건축과 부조(浮彫)는 크메르 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3세기에는 타이인(人)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4세기에 아유타야왕조의 세력이 커지자 1434년에는 앙코르를 포기하고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편, 베트남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참파왕국을 붕괴시키고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타이,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코친차이나에 진출한 프랑스의 개입으로 1863년 타이를 물리쳤으나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90년 동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으며, 왕제(王制)는 형식적으로 존속되었다.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노로돔 수라마리트 국왕 대신 19세의 노로돔 시아누크를 즉위시키고 한때 지배하였으나 1945년 3월 일본의 후원하에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일본 패전 후 프랑스가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나 1947년 5월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왕국 헌법을 공포하여, 프랑스도 1949년 11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은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독립 후에는 사실상 노로돔 시아누크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55년 4월 왕정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 ‘사회주의 인민공동체(상쿰)’를 결성하고 왕위는 아버지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9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 상쿰이 의석 전체를 독점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다시 왕위에 올랐고, 독립 이후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유학파 지식인계층이 귀국하여 1963년 학생시위를 벌인 후 노로돔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조직화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1년 타이, 1963년에 베트남,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정책으로 기울었다. 캄보디아는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보급로 설치를 허용하였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였다.
[캄보이다의 정치]
캄보디아에서는 1970년 시아누크 국왕의 외유중 우익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론놀 정권이 수립되었다. 론놀 정권은 1972년 국명을 크메르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친미(親美)·친서방 노선을 취하였다. 1975년 4월 좌익 크메르루주가 망명중인 시아누크 국왕과 연합하여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였으나 1976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키우삼판을 국가원수로, 폴포트를 총리로 하는 민주캄보디아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의 주도권을 잡은 폴포트 정권은 지나친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으로 불만을 샀고, 친중국 노선을 취해 친소련 경향의 베트남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1979년 1월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은 헹삼린이 폴포트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베트남적인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반정부 3대 파벌세력(시아누크, 크메르루주,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은 1982년 캄보디아연정 수립을 선포하고 정부군과 내전을 벌였다. 헹삼린이 이끄는 프놈펜 정부는 친소-친베트남 노선을 취한 반면, 반정부연합 세력은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의 지지를 얻었고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오랜 협상 끝에 1989년 베트남군이 철수하고, 1990년 정부 대표 6명과 반정부연합 세력 대표 6명으로 구성된 최고민족평의회(SNC)가 결성되어 의장에 시아누크가 선출되었다.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6차 당대회를 열고 기존 사회주의 노선을 대폭 수정하여 다당제와 시장경제제도를 채택하였다.
1991년 10월 파리에서 4개 정치세력이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3년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군병력을 포함한 2만 2000명의 요원을 파견해 과도행정기구(UNTAC)를 구성하였다.
1993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크메르루주는 최고민족평의회에서 탈퇴하고 선거 불참을 선언하였으나, 20개 정당 및 정파가 참가해 90%의 투표율을 기록함으로써 크메르루주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개표 결과 시아누크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당(黨)이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을 누르고 승리하여 제1당이 되었다.
제헌의회에서 입헌군주제 헌법을 채택하고 1993년 9월 24일 시아누크가 국왕에 취임하였다. 시아누크는 푼신펙당의 노로돔 라나리드와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센을 공동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신정부가 두 세력의 연합에 기반하고 있음을 과시하였다. 두 당은 중앙 및 지방의 모든 권력을 분점하였고, 신정부 출범으로 키우삼판이 이끄는 크메르루주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훈센은 1997년 7월 5일 제1총리인 노로돔 라나리드를 공격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1998년 7월 총선을 승리로 이끈 후 1998년 11월 노로돔 라나리드를 국회의장에 임명하고 자신은 단독 수상에 취임하는 신정부를 출범하였다. 2004년 10월 시하누크는 왕위를 노로돔 시아모니에게 양위하였다.
현재 헌법상 국왕은 상징적 권한을 가지며, 의회는 국민의회 및 상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로 국민회의는 임기 5년의 의원 122명으로 구성되고 상원은 임기 6년의 의원 61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의석을 가진 정당은 3개이고, 연립정부에는 2개정당이 참여하고 있다.
지방정부는 22개주, 2개 직할시로 구성되었고 주·시 아래 183개군, 1609개면, 1만 3406개 부락이 있다. 군병력은 1999년 전까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나 감군계획에 따라 1999년 12월 현재 14만 696명으로 줄었으며, 2003년까지 약 10만 명, 2008년까지 약 6만 명으로 줄일 계획이다. 대외적으로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제]
캄보디아는 1975년 이전에는 전적으로 농업, 특히 쌀과 고무에 의존하였으며, 캄퐁참 부근에 철광이 있을 뿐 지하자원은 매우 빈약하다. 1963년에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은행의 국유화, 수출입의 국가독점, 주요 산업체의 국가관리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며, 론놀의 크메르공화국은 공업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폴포트, 이엥사리 정권시대에는 공산독재를 행하여 전체 생산수단의 국유화, 화폐의 폐기, 생활필수품의 소량배급제를 실시함으로써 극심한 생산의 정체를 가져왔고, 국민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심각한 식량부족을 초래하였다.
이에 헹삼린 정권은 농·공업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국민경제의 회복, 시장경제에 따른 계획경제, 강제적인 ‘공동노동·공동식사’ 제도의 폐지, 강제노동의 폐지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노동, 통화·은행·상품유통의 회복을 경제정책으로 내세웠다. 1980년 3월 25일 신통화 리엘의 유통이 시작되었으며 장기적인 내전으로 경제가 피폐해 있어 경제재건책의 일환으로 1982년 11월 앙코르와트 관광이 재개되었다.
캄보디아 인구의 80%가 종사하는 농업은 국가경제의 지주를 이룬다. 주산물은 쌀인데 전체 경작지의 85%를 차지하며 메콩강과 톤레사프 주변이 중심지역이다. 그밖에 고무, 옥수수, 목화, 야자, 잎담배 등의 산물이 있다. 폴포트, 이엥사리 정권은 농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주민의 대부분을 강제로 농업노동에 종사시켜 1977년 이후에는 농업생산의 회복을 선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반면 헹삼린 정권은 강제노동을 폐지하고 기존 농경지의 적절한 경작과 노동에 알맞은 생산물의 배분을 기본적인 농업정책으로 내세웠다. 1981년에 170만ha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9만 5000ha에서 옥수수, 1만 1500ha에서 공업용 작물이 재배되었으나 가뭄과 홍수로 식량부족의 극복은 절망적이었다.
FAO(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1982년도 쌀 부족량은 25만t이나 되었다. 한편, 톤레사프호(湖)의 담수어업도 경제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공업은 매우 낙후된 상태로, 1975년 이전에는 소규모 공장이 있었으나 대부분 농산물 가공공장이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국영 또는 공사(公私) 합동으로 경영하였고 중소기업은 개인기업화되어 있었으나 폴포트·이엥사리 정권은 모든 기업을 통틀어 국유화하였다.
주민을 농촌으로 강제소개시키고 강제수용, 강제노동 정책을 폈기 때문에 공업생산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있었다. 헹삼린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기업활동이 재개되었다. 중요공업으로 방적, 알코올, 제지, 시멘트, 비료, 정미, 양조, 일용품 등의 공장이 있다. 수출의 주종은 농산물인데 쌀과 고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해마다 쌀 10만∼50만t, 고무는 2만∼5만t을 수출하였으나 내전으로 급감하여 1975년 공산정권 성립 이후에는 수출이 거의 정지되었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프랑스·일본·중국·싱가포르 등이 주요 무역거래국이었고 폴포트·이엥사리 시대에는 중국이 주거래국이었다. 헹삼린 정권에서는 러시아와 동독 등이 주거래국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한때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있었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주로 프랑스로부터의 프로젝트에 의한 원조가 대부분으로 프놈펜 공항의 확장, 시아누크빌항(현 캄퐁참)의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론놀 시대에는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가 대신 이루어져 그 액수는 해마다 수억 달러에 달하였다.
폴포트·이엥사리 시대에는 중공이 원조공여의 주역이 되었으며, 1975년 8월 중국-캄보디아 경제기술협력협정, 1977년 9월 중국-캄보디아 경제원조기술협력협정 등을 근거로 주로 무상원조의 형태로 10억 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헹삼린이 들어서고 나서는 베트남, 소련 등의 원조가 강화되었으나 한때는 국민의 반수가 기아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식량사정이 다소 개선되는 추세이다. 1989년 시장경제을 도입한 이후 외국인 투자를 유인하려는 제도적 노력 등에 의하여 1993~1996년간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5.5%로 성장하였다. 1997년 7월 훈센의 쿠데타로 인하여 1998년 말까지는 경제성장률이 1%로 떨어졌으나 1999년에는 다시 4.3%로 올라갔다.
2000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30억 9000만 달러이고, 주요산업은 농업으로 국내총생산의 36%를 차지한다. 무역부문에서는 총수출액이 10억 5000만 달러, 수입액이 14억 3000만 달러이며, 주요수출품은 봉제품·목재·고무·어패류와 대두·옥수수 등 농작물, 주요수입품은 석유제품·담배·돈·건설자재·자동차·
전기제품이다. 주요수출국은 미국·싱가포르·타이·독일·중국, 주요수입국은 타이·홍콩·싱가포르·중국 등이다.
[캄보디아의 교통]
캄보디아의 철도는 전체길이가 약 603km로 프놈펜에서 바탐방을 지나 국경을 넘어 타이에 이르는 노선과 프놈펜∼캄퐁참 노선이 있으나 모두 단선(單線)이다. 도로는 1997년 현재 전체길이 3만 5769km로 이 가운데 4,165km가 포장되어 있으며, 베트남 호찌민(사이공)∼프놈펜∼바탐방 간, 프놈펜∼시엠레아프 간 등의 국도가 있다. 수로(水路)는 모두 3,700km로 90%가 메콩·톤레사프수로이며 중요 무역항으로는 하항인 프놈펜과 유일한 해항인 캄퐁참 외에 캄포트·크롱카오콩이 있다. 1982년 9월부터 프놈펜∼호찌민의 항공로를 개설·운항하고 있다. 1999년 현재 공항은 19개, 헬리콥터공항은 3개 있다.
[캄보디아의 사회]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내전, 폴포트 시대에 크메르루주 정부가 저지른 대량학살 등으로 인해 1985년의 총인구는 1975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2000년 현재 인구증가율은 2.27%, 출생률은 1,000명당 33.48명, 사망률은 10.79명, 영아사망률은 66.82명이다. 평균수명은 56.53세로 남자는 54.44세, 여자는 58.74세이고 15세 이하 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42%를 차지한다. 교육은 초·중등학교와 고등교육기관이 있으며, 6∼12세를 대상으로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15세 이상 문맹률은 65%로 높다.
[캄보디아의 문화]
캄보디아 국교가 불교이므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불교사원은 예배, 교육 및 사회활동 장소이다. 이밖에 참이슬람교, 고산족 종교(원시종교, 샤머니즘), 유교 및 도교(화교), 천주교, 개신교 교회도 있다. 특히 세계적 문화유산인 앙코르문화가 유명한데, 이곳의 건축과 조각 유물들은 다른 문화 유적들과 함께 파괴·약탈되고 관리가 소홀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캄보디아 여자들은 ''사롱''이라는 큰 천으로 된 것을 평상시 집에서 입고 머리에는 ''끄로마''라는 천을 두르며, 남자들은 ''사롱솟''이라는 옷을 입는다. 결혼식 및 잔치는 주로 건기인 12~5월 사이에 거행되며, 전통 혼례가 주류이나 가끔 서양식 결혼 장면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과학기술]
캄보디아 우정전기통신부(MPTC)는 통신산업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국내 및 국제 통신 서비스를 독점 제공하고 있다. 1998년 중반 현재 2만 1800회선을 확보하고 있으며, 교환망의 디지털화는 100% 달성하였다. 국제망은 1990년의 협정 체결로 텔스트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텔스트라는 1대의 국제 관문교환기와 5,000가입자 회선을 갖춘 프놈펜의 국제통신센터를 운용하고 있다. 셀룰러 전화서비스 가입자는 1998년 현재 3만 4880명이다. 셀룰러 사업자로는 캠텔, 카사콤 등이 있다.
1998년 현재 AM 라디오방송국 7개, FM 라디오방송국 3개, 단파 라디오방송국 3국이 있고, 텔레비전방송국은 1999년 현재 국영방송국인 캄보디아 국가텔레비전이 있고 4개의 상업방송이 프놈펜과 주요 지방도시에서 방영된다. 인터넷서비스는 1997년 5월 시작되었고, 캠넷과 텔스트라 2개사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캄보디아와 대한민국 관계]
캄보디아는 남북 동시 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70년 3월 론놀 정권이 수립되면서 국교가 시작되었으나 론놀 정권의 붕괴와 함께 1975년 4월 공관을 철수하였으며, 교역활동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6년 5월에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 북한과는 1964년 12월 28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8년 12월 현재 약 350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의 대(對)캄보디아 투자진출 승인실적은 총 124건, 약 2억 7667만 4502달러로서, 연도별로 점차 증가 추세에 있고 투자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인이 272명 체류하고 있다.
[국수: 꾸이띠유]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쌀국수의 일종이다. 다양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데 국물은 맛을 결정 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위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해산물 등을 얹어서 먹는다. 양념으로는 향채가 나오는데 생숙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쌀이 많이 났던 캄보디아에서는 밀 대신에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 것이‘놈번쪽'으로 꾸이띠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놈번쪽 맛을 본 중국 귀족이 본토로 넘어가 비슷하게 흉내내어 만든 것이 꾸이띠유인데 그 맛이 놈번쪽보다 좋아 캄보디아로 다시 전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프랑스 바게트가 변형된 것으로 고소한 맛이 강한 놈빵과 함께 먹기도 한다.
[의류 색깔, 끄로마]
캄보디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끄로마라는 체크무늬의 커다란 천을 소지하고 다닌다. 서민생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으로 지역이나 종족마다 색깔이 다른 경우도 있는데, 캄퐁참 지역에서는 푸른색 계열을, 타카에오에서는 붉은색의 끄로마를 많이 사용한다. 크기는 보통 길이 1.5m, 넓이 50cm 정도이고, 용도가 아주 다양해 캄보디아 사람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생활 필수품이다.
햇볕가리개 용으로 터번처럼 머리에 쓰거나, 수건, 베게, 이불, 보자기가 되기도 하고 옷의 대용품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하의 대신에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여신: 압사라]
압사라는 '천사'라는 의미로 '춤추는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의 압사라들은 천상의 춤을 추는 신성한 사람들로 여겨져 왕궁에서 살았으며 결혼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압사라들이 추는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복잡하고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국인 타이의 전통춤과 비슷한 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과거에 그들이 자신들의 무용을 훔쳐갔다고 생각한다. 앙코르사원 벽화의 손 동작을 연구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설날: 촐츠남]
캄보디아의 설인 촐츠남은 일년 중 가장 무더운 4월 14일이다. 태양력이나 불력으로 보았을 때 새해 첫날이 아니라는 점이 이상한데,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치밀한 연구를 한 끝에 정한 날이라고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 국민의 90~95%가 농민인데, 기후 조건 때문에 양력 11월~3월에 모심기, 물빼기, 수확 등을 해야하기 때문에 가장 바쁘다. 이 시기에 설을 치러야하는 농민들의 부담을 없애기 위해, 일거리도 없고 비도 오지 않는 가장 무더운 날을 설날로 정한 것이다.
촐츠남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찾아가거나,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새롭게 장만한 음식을 들고 절에 간다.
절에 가서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데, 스님은 답례로 일년 동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준다. 이 시기에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차 등에게 물을 뿌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벼락을 맞고도 화를 내는 사람이 없는데, 이는 액운을 쫒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면 민속놀이를 하거나 전통춤을 추며 흥겹게 노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킬링필드: 집단, 대량학살(제노사이드)]
1975년~1979년의 캄보디아는 공산정권에 의해 피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1975년 4월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라는 무장단체가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잔혹한 시대가 시작되다. 크메르루즈 통치 3년 7개월은 캄보디아의 전통과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프놈펜을 장악한 크메르루즈 정부는 화폐, 시장, 종교조직, 학교,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정부의 일을 했거나 군부에 있었던 사람들은 즉시 사살하였다. 시민들을 협동농장식 자급자족을 시킨다는 미명 하에 강제 노역에 동원하려고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주하는 동안 식량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극한의 피로, 그리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투스렝에 있는 평화스러웠던 툴스베이프레이 여자고등학교 건물은 비밀 수용소 S-21이 된다.
이곳에 가혹한 고문을 받은 수용자 중 17,000명은 사형수로서 다리에 족쇄를 차고 프놈펜 남부 12km에 있는 죽음의 장소인 킬링필드로 끌려갔다. 사형 집행인들은 비싼 총알대신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비닐로 숨을 막고, 구덩이를 파고 살아있는 사람을 밀어 넣는가 하면 심지어 어린아이들을 나무줄기 사이에 목을 끼워 죽이는 끔직한 만행을 저질렀다. 1980년대의 발굴 결과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고, 발굴한 사람들은 기념탑을 만들어 뼈와 옷가지 등을 수습하여 안에 안치했다. S-21은 전쟁이 끝난 후 툴스렝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당시의 잔혹했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매년 5월 9일 위령제를 열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신성한 소: 프레아코]
프레아코는 '신성한 소'라는 뜻이다. 캄포츠낭 지역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외양간에 모여드는데, 이곳에는 프레아코(Preah Ko)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가 아픈 부위를 핥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다. 소를 찾아온 사람들은 일정한 돈을 내고 소가 핥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 소 주인의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불면증이나 허리 아픈 것을 소가 핥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소는 힌두교의 신 시바가 타고 다니던 동물이었기 때문에 숭배시되었던 것으로 유추되는데, 앙코르와트나 첸라국시대에 지어진 사원 프레아코 등 여러 역사 유물에 등장하고 있다.
[수도, 프놈펜 Phnom Penh]
메콩강(江)과 톤레사프강(江)의 합류점에 있다. 크메르인(人)·프랑스인(人)·중국인(人)·베트남인(人) 등이 많이 살며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외항선이 메콩강을 소항(遡航)하며, 1959년 콤퐁솜(시아누크빌)에 항구가 개발되기까지 캄보디아 유일의 외국무역항이었다.
앙코르와트의 유적이 있는 크메르 민족의 왕조는 현재의 시엠레아프 지역에 있었는데 15세기에 서쪽 이웃인 타이의 공격을 피하여 처음으로 프놈펜에 왕도를 정했다. 프놈펜은 동쪽의 베트남에게도 시달렸으므로 역대의 왕은 우동을 왕도로 삼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보호조약으로 타이·베트남으로부터의 위협이 해소되었으며, 1867년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로부터 캄보디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시 중심부에 프놈펜이라는 명칭이 유래한 펜의 언덕이 있고 이 곳에서 남쪽의 독립기념관(1963년 완성)까지 노로돔 거리가 뻗어 있다. 남동부에는 톤레사프강에 면하여 아름다운 왕궁과 박물관·사원 등이 있어 크메르 문화의 유품들을 보존한다.
[왕궁]
1866년에 지은 건물로 국왕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국가행사나 외교사절단이 왔을 때만 공개된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높이 59m의 황금탑 건물이 즉위전이다. 파빌온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영화를 상영했던 곳으로 시크누빌왕이 만들었다. 왕궁 안에는 2층 구조의 나폴레옹관이 있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제니가 1900년대 초반에 프랑스에서 배로 실어나른 재료들로 지어졌다. 현재는 캄보디아 역대 국왕들의 사진과 계보를 전시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받은 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왓 프놈]
왓 프놈은 '언덕 위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사원 주변은 푸른 숲이 우거져 있어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코끼리를 타거나 방목하는 새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민들에게 있어 도심속의 휴식처와 같은 역할하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메콩강의 범람으로 인해 이곳으로 떠내려 온 네 개의 부처님 상을 펜(Penh)이라는 여인이 건져서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여인의 이름과 사원의 이름을 합쳐 '프놈펜'이라는 도시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계단에 조각된 나가와 사자상이 눈길을 끈다. 본당에는 황금 부처상이 모셔져 있고, 벽과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본당 뒤에는 거대한 불탑이 한 개 솟아있고 그 주위를 7개의 작은 탑이 둘러싸고 있다.
[투슬랭박물관]
'킬링필드'의 역사적 현장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다. 1975년 이전에는 평화로운 툴스베이프레이 여자고등학교였으나 공산혁명 단체인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자 S-21(Security office-21)이라는 수용소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전직관료, 군인, 승려, 학생과 그들의 가족들이 감금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아 죽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문 도구와 살해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2만 여 명이 수용되었으며 대부분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앞마당엔 추모비를 세워두었다.
[실버 파고다]
왕궁에 있는 나폴레옹관과 나란히 붙어있는 파고다 사원이다. 불당 바닥에 총 5만 3294개의 은이 박혀 있어 실버파고다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원 안에는 90kg에 이르는 황금부처상을 비롯해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불상들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스리랑카에서 넘어온 에메랄드 불상이 있으며, 사원의 안쪽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독립기념탑]
캄보디아의 동전 10리엘에 그려진 탑으로 친숙하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한 것을 기념해 1958년에 만든 탑이다. 앙코르와트의 중앙탑을 모방해 만들었으며, 주변에는 캄보디아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독립기념일과 같은 주요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노르돔거리와 시아누크거리가 교차하는 장소에 있다.
[씨엠레아프 Siem Reap]
프놈펜 북서쪽 약 300km 떨어진 시엠레아프강의 우안에 위치한다. 캄보디아어로 ‘패배한 타이’를 뜻한다. 앙코르 시대에 축조된 제방 도로상에 도시가 있으며, 크메르 왕국 멸망 후에는 타이령(領)이 되었으나, 프랑스령시대에 타이로부터 할양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앙코르와트에서 4km쯤 떨어져 있어 앙코르와트의 현관 구실을 하므로 관광호텔 등이 있다.
시엠레아프강은 프놈쿨렌 고지를 흘러 앙코르와트의 동쪽을 남류하여 톤레사프호(湖)로 흘러든다. 9∼15세기에는 크메르 왕국의 중심지로 번영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관개시설에 의한 미작지대의 중심지이다. 타이로 통하는 도로가 이어진다.
[앙코르왓트]
앙코르유적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앙코르와트는 수라바르만 2세가 건립하였다. 보통의 사원은 종교적 의식 때문에 동쪽으로 짓는데 앙코르와트는 서쪽으로 지어져 있어 의문을 자아내는데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주변에 해자를 둘러 놓았기 때문에 입구에 있는 다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중앙의 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앙코르와트에서 가장 높은 중앙탑이 보인다. 입구 왼쪽에는 일곱 개의 뱀머리를 가진 나가 조각상이 서 있다.
[라마야나 벽화]
일반인이 출입하는 서쪽에 있는 탑문에 들어서면 1층 회랑 입구가 나오는데 과거에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의 저항 흔적인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의 경사가 급하므로 주의해야만 한다. 벽에 새겨진 부조는 힌두교의 신화를 주제로 한 경우가 많은데 그 모습이 섬세하고 아름다워 앙코르와트 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① 서면 북쪽은 인도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라마왕자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 낭시타를 주변국인 롱카의 사악한 왕에게 빼앗긴다. 라마는 원숭이의 왕인 하누만의 원조를 받아 롱카의 왕을 제거하고 낭 시타를 찾아온다는 권선징악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② 서면 남쪽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이야기를 묘사해 두었다. 인도의 왕실가족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묘사해 두었다. 좌측의 공격부대는 카우라바 군대로 100여 명의 왕자가 1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있으며, 우측은 판다베르 군대로 다섯 형제가 70만의 군대를 이끌고 싸움을 벌인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판다베르 군대가 승리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③ 남면 서쪽은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군도가 조각되어 있다. 앙코르와트를 지은 주인공인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④ 남면 동쪽은 인도의 신화인 '천국과 지옥'이 묘사되어 있다.
죽은자의 신 야마가 긴 행렬을 이룬 사람들을 재판하여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한다. 부조 위쪽은 천국, 아래쪽은 지옥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다.
⑤ 동면 남쪽은 힌두교의 천지창조에 관한 '젖의 바다 휘젓기'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신과 악마들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비슈누신이 힘을 합쳐 바다에서 불로장생 약을 찾자고 제안한다. 비슈누신이 뱀의 목을 감고 뱀의 몸 양 옆을 아수라(악마)와 테바(신)에게 잡게 하였다. 1,000년의 세월 동안 바다를 휘젓고 다니자, 젖의 바다로 변하고 그 과정에서 압사라를 포함한 여러 신이 태어난다. 그리고 불로의 묘약인 아므리타를 바다로부터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⑥ 동면 북쪽에서 북면까지는 어떤 이유인지 미완성이었는데 16세기에 당시 왕이 발견하고 중국 장인을 시켜 완성했지만, 예술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1층을 지나 2층으로 가려면 밭전(田)자 모양의 회랑을 거쳐야하는데 4개의 커다란 웅덩이를 만나게 된다. 신에게 다가가기 전에 몸을 깨끗이 씻는 곳이었다는 주장이 많다. 2층에 들어서면 1층보다 급경사의 계단이 나타난다. 2층에는 특히 아름다운 여신상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사원 안에는 어디에서나 여신상을 볼 수 있는데 그 수가 1,560개나 된다.
3층은 신들이 산다는 중앙사당이 있다. 이곳에 올라가는 계단은 70˚정도의 경사가 져 있어 몸을 바싹 엎드리고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신에게 다가갈 때 자신을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탑(사당) 외곽으로 4개의 탑이 서 있는데, 이들을 연결하는 밭전(田)자 모양 회랑이 있다. 그리고, 4개의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탕 혹은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중앙사당은 높이가 65m인데 정면인 서쪽의 낙조가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앙코르톰과 바이욘(Angkor Thom & Bayon)]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 7세(재위 1181~1201)에 의해 세워진 성곽도시로 '대 왕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177년 앙코르와트는 참파족에 의해 점령당하지만, 얼마 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들을 몰아내고 1181년 왕좌에 앉는다. 하지만 도성이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더욱 견고한 성을 만들기 위해 앙코르톰을 짓고 중앙부에 왕실 사원인 바이욘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바이욘은 4면에 관세음보살(아바테스바라)이 동서남북을 향하게 조각되어 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어 '앙코르의 미소'라고도 불린다. 외벽에는 당시 생활상을 표현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앙코르톰의 중심에 바이욘이 우뚝 서 있고, 주변에는 한 변이 3km, 높이 8m인 정사각형인 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바깥으로는 너비 113m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는 문은 동서남북 지점에 각 1개씩 4개의 문이 있으며, 서쪽 문 위쪽에 '승리의 문'이 한 개 더 있어 총 5개의 문이 있다.
[타프롬]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랑왕생을 비는 마음에서 건설한 불교 사원이다. 사원의 규모는 가로 600m, 세로 1,000m로 앙코르와트 유적지 중 가장 크다. 당시 이 사원을 관리하기 위해 2,500명의 성직자와 12,000하급 성직자가 관리할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폐허 상태로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특히 커다란 나무 뿌리에 침식당하고 있는 모습이 신비스럽다.
무화과, 보리수 등의 커다란 나무 뿌리가 벽과 지붕에 내려 앉고, 담과 문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자연의 위용을 느낄 수 있음과 더불어 영화롭던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한다.
[반티스라이(Banteay Srei)]
'여성의 성채'라는 뜻을 지닌 사원으로 967년에 야즈나바라하라(Yajnavaraha)라는 고승이 세운 힌두교 사원이다. 붉은색 사암을 많이 사용하여 해가 질 때면 신비스러운 붉은 광채를 낸다. 중앙 성채에 모셔진 '테바다 여신상'이 유명하다. 테바다가 짓고 있는 미소로 인해 '동양의 모나라자'로 불릴 정도로 극찬받고 있는 작품으로 '말로 사건'으로 유명세를 탔다.
말로 사건은 1923년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앙드레 말로'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본국으로 가져가려다가 프놈펜의 항구에서 잡혔던 사건으로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말로는 《왕도》라는 작품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프레아비히어]
9~11세기에 건축된 건물로 타이와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캄보디아 인의 자존심과 같은 곳으로 타이가 자신의 영토라고 국제재판소에 제소되었는데 재판소는 캄보디아 손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2,8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찾아 가는 길이 험하였지만, 2004년 캄보디아와 연결도로가 개통되어 가기가 좋아졌다.
[바푸욘]
앙코르톰 안에 있는 사원이다. 앙코르톰이 지어지기 이전인 11세기에 건립된 힌두교사원이다. 사당으로 가는 참배로는 높이 2m의 원주가 4열로 지탱하고 있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재현한 것으로 난간이 없어 마치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푸욘이란 '숨긴 아이'라는 뜻인데 크메르왕과 샴왕에 관한 전설 때문에 생겼다.
그 옛날 두 왕은 형제 사이였는데 샴의 왕이 자신의 왕자를 크메르왕에게 맡기자 모략으로 오해한 크메르왕은 왕자를 죽여버린다. 분노한 샴의 왕이 크메르왕국과 전쟁을 벌이러 나서자 이 소식을 들은 크메르왕의 왕비가 아들을 숨겼다는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왕궁 터]
앙코르톰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왕궁의 터이다. 왕궁 중앙에는 피미안아카스와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목욕탕이 있다. 신을 위한 시설은 석재, 인간을 위한 곳은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왕실 등은 남아 있지 않다.
동쪽의 입구는 코끼리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다.
[피민아나카스]
왕궁터 가장 중심부에 있는 사원으로 '하늘의 궁전'이라는 뜻을 지닌 사원이다. 11세기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메루산을 상징하느 피라미드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중앙탑에 '머리가 아홉개 달린 뱀'의 정령이 살았는데, 밤마다 여자로 변신하여 왕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만일 왕이 정령과 매일밤 동침을 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쳤다고 한다.
[코끼리테라스]
바푸욘 입구에서 라이왕의 테라스에 이르기 전까지 350m의 길이로 길게 늘어선 벽면에 코끼리 모양의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 있어 코끼리테라스라고 이름 붙여졌다. 계단의 한쪽에는 머리가 세개인 코끼리신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테라스 부근에 '승리의 문'이 있는데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이곳을 통해 들어와 왕에게 보고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라이왕의 테라스]
코끼리테라스의 북쪽에 위치한다. 이름은 크메르 신화인 '문둥병(라이) 왕'의 주인공 조각상을 모신 것에서 유래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왕이 밀림에서 뱀과 싸우다가 피가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 조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프놈펜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롤루스의 유적]
롤루스는 앙코르와트 이전의 수도였던 곳이다. 현존하는 유적으로는 로레이, 프레야코, 바콩 사원이 있다.
[모두 9세기 초반 인드라바르 1세가 건립한 사원들이다.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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