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
‘한국군 증오비’... , 위령비가 아닌 증오비가 세워져 있는 마을, <빈딘성 빈호아> 마을이다.
1966년 12월, 빈호아에서는 한국군에 의에 430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같은 날, 온마을이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 희생을 기억하며 빈호아마을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증오비’를 세웠다.
그 증오비 옆에는 한국군이 구덩이를 파고, 마을 사람들을 그 곳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학살(재노사이드)한 공동묘지가 있다。
“남조선군이 빈호아에서 학살한 민간인이 여성, 어린이 7명、 강간피해자 2명、 배가 갈려 죽은 희생자、 머리가 갈려 죽은 희생자、 임산부 희생자 7명” 등 비문에는 상세한 통계까지 담아 기록하고 있다。
다섯 번째 방문인 것 같다만 늘 그 곳에 서면 그 처참함에 눈물이 나고, 입은 닫혀져 버리고, 마음은 무겁다.
한-베 평화재단 함께 7월 27일(금)-8월 1일(월), 4박 6일동안 베트남 한국군민간인학살 피해지역을 방문한 평화기행팀은 고등학생부터 60대까지 연령대에, 알바노동자, 기자, 극단 단원들, 시민단체 활동가들, 주부, 연구자, 국회의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빈호아마을 앞에 세워진 증오비 앞에서、집단 학살터 앞에서 향을 피우고、헌화하며 ‘한국’의 죄악에 대해 참담한 마음으로 사죄를 빌었다。
국회에서 진상규명과 피해자명예회복을 위한 법 제정을 위해 힘쓰겠다는 약속도 드렸다。
빈호아 꺼우마을 학살 현장도 찾아갔습니다. 빈호아에서 일어난 한국군 민간인 학살로 430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는데, 그 중 12월 6일 빈호아사 꺼우 마을의 동코 우물가에서 141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비마다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희생자들은 대부분 노인이고 여성이고,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젖먹이 아이들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주민들을 몰살한 뒤 볏단과 분뇨 등을 퍼부어 동코 우물을 덮어버려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까지 파괴를 했다. 그 학살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엄마의 품에서 도안 응이어 씨는 살아남았다. 마을 앞에 펼쳐진 초록들판 위에 쓰러졌을 마을 사람들,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슬픈 삶... 마을 한 가운데 세워진 위령비에 향을 올리며 참배하며, 참가자들은 하루속히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배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하미마을 위령비 앞에서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역사를 마주합니다. 하미마을은 위령비는 다른 마을의 위령비와 조금 다릅니다.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하미마을사람들의 이름과 나이만 새겨져 있고, 비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큰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미 마을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디엔즈엉사(면)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1968년 2월22일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군인들의 학살로 주민 135명이 숨진 곳입니다. 하미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는 2001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건립 비용을 지원해 설립됐는데, 마을 유가족과 주민들은 참전단체가 잘못을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자를 기린다는 전제 아래 위령비 건립을 받아들인 터여서, 한국군의 학살을 자세히 묘사한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설립 직후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 단체는 비문 삭제를 요구했고, 하미마을 유가족협의회는 비문을 지우는 대신 언젠가 다시 공개하겠다는 의미에서 연꽃 문양의 대리석으로 비문을 덮어뒀고, 참전 단체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을 뽑았습니다.
그 모순의 비 양옆에는 집단학살 무덤이 있습니다. 한국군 청룡부대 대대가 하미마을 사람들을 향해 수류탄을 터트리고 총을 쏘며 학살한 후 시신들을 한 곳에 모으고 불도저로 시신들을 밀어버렸습니다. 한국군이 마을을 떠난 후 인근마을 주민들이 마을로 들어와 큰 채반을 끼고 긴 대나무젓가락을 들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신 살점과 뼛조각을 모아서 화장을 했습니다. 그 한줌씩 유가족들에게 나눠주고, 그 유골들의 반을 집단매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월남참전전우복지회 후원으로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학살 그 후 우리의 또다른 부끄러움의 현주소를 마주하며 우리도 분노합니다. 희생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헌화를 하며 빠른 시일 안에 연꽃 아래 비문이 드러나 다시는 이런 학살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말할 수 있는 날, 피해자들에게 한국정부가 사죄하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며 영령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추모비에서 걸어서 5분여 위치에 살고 계신 하미학실 피해자 응우옌티본 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평화기행단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본 님은 사건 당시 6살이었습니다. 학살 피해로 머리에 수류탄 파편상을 입었고 그의 여동생 봉도 수류탄 피해로 턱이 함몰되는 심각한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오빠, 언니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겨우 6살이었던 자신이 학살에서 살아남아 생계를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며 버틴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여동생이 다낭의 독일의료선에 후송된 후 2년 뒤에는 연락마저 끊겨 생이별을 했던 아픔을 이야기할 때는 중간 중간에 긴 침묵,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는 현실앞에 깊은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눈물조차 죄스런 시간들입니다.
하루속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비내리는 퐁니.퐁넛마을 학살현장에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역시 학살의 기록들과 마주했습니다. 비가 올 때는 향은 피우지 않는다 합니다. 위령비 앞에 헌화하며 비문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한 분 한 분 새겨넣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자료가 있는데 왜 한국정부가 인정을 안하고 항소를 했나요?” 퐁니퐁넛마을 학살생존자 응우옌티탄 님의 분노가 떠올랐다.
한국정부는 하루속히 베트남민간인학살 범죄와 성폭력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배상하라!!!
[05. August 2023]
#미안합니다_베트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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