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백교회(告白敎會, 독일어: Bekennende Kirche, 영어: Confessing Church)는 1934년 히틀러에 반대하여 설립된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말한다.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느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여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였다.
*
* 고백교회(告白敎會, 독일어: Bekennende Kirche, 영어: Confessing Church)는 1934년 히틀러에 반대하여 설립된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말한다.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느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여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였다.
*

마르틴 니묄러
*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경우,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 (1976년 버전)
제목 :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 지은이 마르틴 니묄러(1892년-1984년) 목사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1933년 2월 27일, 베를린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
*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1933년 2월 27일, 베를린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독일어: Reichstagsbrand [ˈʁaɪ̯çstaːksˌbʁant] 라이히스타크스브란트는, 나치 독일 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핵심 사건으로 1933년 2월 27일 오후 9시 14분에 발생했다.
최초의 목격자는 국회의사당 근처를 지나가던 한 대학생이었다. 의사당을 지나던 중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목격자는 즉시 화재를 신고했고, 베를린 소방대가 의사당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당은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소방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경찰은 불길이 여러 곳에서 수직으로 치솟으며 동시에 발화한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발가벗고 건물 뒤에 움츠려 숨어 있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네덜란드어: Marinus van der Lubbe)를 발견했다. 판데르뤼버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실직 벽돌공으로 그 당시 최근에 독일로 넘어온 상태였다. 발견 당시 판데르뤼버는 방화용 도구를 소지하고 있었다.
불길에 치솟는 독일 국회의사당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당시 국회의장),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 등이 곧 현장에 도착했고, 화재 현장을 보자마자 괴링은 즉각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선언했으며,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소리질렀다.
아직 화재 진압 중이었고, 괴링의 이 선언으로 화재 사건은 수사도 하기 전에 공산주의자들의 방화로 그냥 굳어졌다.
이때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 감상 중에 같이 현장으로 달려온 괴벨스도 그의 일기에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썼다.
히틀러는 비상 사태를 선언할 기회를 잡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1919년)의 인권 조항 대부분을 폐지하는 의회 방화에 관한 법령 (비상사태법)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나치 지도자들은 이 의회 방화 사건이 코민테른의 행위로 밝혀졌다고 주장했으며, 범인으로 나중에 "의회 방화 사건 재판"으로 알려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1933년 3월 초에 체포된 3명의 남자를 내세웠다. 이들의 이름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였다. 사실 이들을 체포한 프로이센 경찰은 이 불가리아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된다는 신고를 받고 체포했을 뿐으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체포하고 나서야 그들이 코민테른의 중요한 인물들임을 알았다. 당시 디미트로프는 서유럽 코민테른 활동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당은 이 화재가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한 신호라고 주장하고,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탄압에 나섰다. 이러한 탄압은 공산 테러에 반한 십자군으로써 민주적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되었다.[1]
목차
*
*
*
*
*
*
*
*
*
*
*
*
*
1933년 2월, 히틀러가 수상이 된 직후: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연립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 수상이 된 직후 히틀러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회를 해산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해산 후 재선거를 통해 정부 내에 나치당 의석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총선거가 1933년 3월 5일로 잡혔다. 히틀러의 목적은 합법의 테두리에서 법적 모양새를 갖추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권위임법은 수상에게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법률을 의결할 수 있도록 바이마르 헌법에서 허용된 특별한 힘이었다. 전권위임법은 본래 극단적인 비상사태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고, 정부가 초인플레이션을 잡아 독일을 구하기 위해 사실 1923년 ~ 1924년에 딱 한 번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법을 활성화기 위해서는 의회 의석 수의 2/3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1933년 1월, 나치는 의석의 단 32%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의석 수로는 전권위임법을 가결하여 통과시킬 수가 없었다.
날조 이유 :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정권이 모든 권력을 가질 법
선거 기간 동안 나치는 독일에 공산주의 혁명이 임박했으며, 그걸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는 것뿐이라면서 신경질적인 반공산주의 정강을 주장했다.
히틀러의 선거 강령은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나치의 의석 수를 더 늘려달라고 투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권위임법에 반대 투표를 할 수 있는 반대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히틀러는 독일 공산당(KPD)의 추방을 계획했다. 당시 독일 공산당은 새 의회가 개회하기 전 선거 후에 의석 수의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사당 방화 사건은 히틀러에게 공산당 추방에 속도를 낼 수 있게 해주었고, 공산주의 혁명이 임박했다는 나치의 주장을 대중의 눈 앞에 확인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나치는 의사당 방화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험신호라고 주장하고,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고 국민들은 공산은커녕 소비에트 연방식 지배를 당해 처참하게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선동했다.
판데르뤼버를 고문하고 공산당을 금지한다
고문 끝에 판데르뤼버는 자기 혼자서 제국 의회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행정부에게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때 베를린 경찰에 따르면, 판데르뤼버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방화하고 자백했다고 우겼다. 의회 방화 사건에 관한 법령에 따라 독일 공산당(KPD)은 그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서 1933년 3월 1일 국회 등원을 거부당했다. 이어서 경찰과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SA가 독일 내 모든 공산당 건물들을 장악했고, 공산당이 쿠테타에 사용할 무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나치가 금지한 첫 번째 정당이 되었다.
작전 결과 :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국회를 장악한다
언론 접근이 차단되고, 지도자들이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경찰과 돌격대의 공격을 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리멸렬하여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공산주의자들과 몇몇 SPD 당원들은SA가 막아서는 바람에 국회 등원을 할 수 없었다.
나치는 자신들의 득표율을 44%까지 올릴 수 있었고, 그 표들은 나치의 우호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8%를 합쳐 52%로 다수당이 되게 해주었다. 그러나 3월 선거는 나치에게는 마지막으로 승리한 선거였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나치는 자신들만으로 50~55%의 득표율을 기대했다.
결국 나치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2/3 이상 다수표를 확보하기 위해 남은 정당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찬성표를 던지도록 했고, 그 결과 대부분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류되었다. 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회민주주의자들만이 전권위임법에 반대 투표를 했다.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기치로 내건 독일 중앙당이 찬성 몰표를 던져 전권위임법이 통과되고 히틀러는 전권을 장악한다. 1933년 4월에, 모든 비 나치 정당들은 불법화되거나 체포와 강제수용소 수감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산했다.
판데르뤼버의 처형
편집
재판에서 판데르뤼버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10일에 참수되었는데, 이 날은 그의 25번째 생일 3일 전이었다. 나치는 판데르뤼버가 공산주의 음모가 집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 음모가 집단이 국회 의사당을 불태우고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치는 화재 다음 날 새벽부터 각지의 공산당 본부를 경찰과 돌격대를 동원하여 압수 수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봉기 음모를 입증하는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보되었다는 문서"들은 증거로써 재판정에 제출된 적도 없고, 공개된 적도 없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판데르뤼버가 자신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나치 음모단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판데르뤼버는 어떤 목소리가 나치 체제 하에서 독일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을 불태우자고 그에게 말했다면서 단독범행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무죄이다
라이프치히 재판은 1933년 9월 2일부터 12월 23일까지 열렸고, Reichsgericht라고 불린 구 독일 제국 법원 출신의 재판관들이 재판을 주재했다.
라이프치히 재판은 폭넓게 선전되었고,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히틀러 정권은 당연히 모든 조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유죄인 것을 인정하고 모든 반국가 세력에 대하여 나치가 주도한 진압 및 이로 인해 조성된 공포를 찬성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주요 범죄 용의자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디미트로프는 검사들을 상대로 법정에서 논쟁을 통해 싸웠으며,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법정은 곧 공산주의와 나치즘 간에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과 공산주의자 동지들이 무죄임을 증명했고, 석방되었다. 거기에 더해, 디미트로프는 방화자가 나치당의 주요 멤버인 것도 증명해보였다.
괴링과 괴벨스 등은 라디오를 통해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고, 게슈타포와 형사경찰(KRIPO)이 공산당 본부인 카를 리프네히트관을 습격하여 100파운드에 달하는 폭력봉기 계획과 관련한 문건을 압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증거물들이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았다. 압수했다는 주장만 제출되었다.
히틀러는 재판 결과에 격노했다. 그는 앞으로는 반역죄에 대해서는 오직 새로 설립될 민족재판소(Volksgerichtshof)에서 다루라고 명령했다. 후에 이 재판소는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이끄는 동안 수많은 악명을 남기게 된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에서 판데르뤼버의 역할에 대한 논쟁
역사가들은 대개 판데르뤼버가 의사당 화재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피해 정도가 그가 혼자서 했다는 것에는 의심을 하고 있다.
화재가 건물에 퍼진 속도를 고려할 때, 명성에 굶주린 정신 불안 방화범이라는 판데르뤼버의 평판과 지도급 나치당 관계자의 애매한 논평이 나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관계했을 것이라고 믿게 하고 있다.
나치가 계획하고 실행한 다음, 판데르뤼버에게 뒤집어 씌워 공산당을 탄압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치나 공산주의자 모두 관계가 없고, 오직 판데르뤼버의 혼자서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나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판데르뤼버가 "얼간이" 또는 "정신불안자"였다는 생각은 폭력적인 반파시스트와 거리를 두려 했던 공산당의 선전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한스 몸젠은 사건 당일 나치 지도자들이 패닉 상태였고, 그들이 공산혁명이 즉시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그들의 선전 활동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결론지었다.
괴링의 가능한 역할
뉘른베르크 재판 때, 프란츠 할더 장군은 괴링이 화재 사건에 대해 농담한 것을 진술했다.:
1942년, 총통 생일 점심 때 일이다. 그날 총통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제국의회 의사당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괴링이 대화에 끼어들어 소리질렀던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진짜 제국의회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다, 내가 제국의회에 불을 질렀거든." 이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뉘른베르크에서 대질심문에서 괴링은 할더의 진술을 들었지만, 그가 화재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거부했다.
할더의 진술은 넌센스라고 하면서 괴링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제국의회에 불을 지를 동기나 이유가 없다. 예술적 관점에서, 나는 의회가 불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더 멋진 의사당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난 몹시 속상했다. 제국의회의 새로운 장소를 찾아야 했던 난 크롤 오페라 하우스(화재 후 의사당으로 사용됨)를 포기해야 했다. 오페라는 나에게 제국의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독일 공산당의 "역재판"
1933년 여름, 독일 공산주의자 망명자들과 민주주의자, 반나치 선전가, 변호사들로 구성된 그룹이 역재판 예심을 런던에서 개최했다. 역재판의 재판관은 영국 노동당 정치가 스태포드 크립스 경이었으나, 역재판 배후의 조직 의장은 독일공산당 소속 빌리 문젠베르크였다. 역재판은 1주일간 지속되었고, 결론은 혐의자들이 무죄라는 것, 진짜 방화범들은 주요 나치당 엘리트들이 지목되었다.
괴링은 이 예심에서 유죄로 선고받았다. 역재판 예심에서,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가 검토되면서 공동작업장이 되었고, 피고들의 모든 진술이 준비되었다. "역재판"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몬젠베르크는 그의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갈색책"을 썼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고 탄압하기 위한 음모라는 내용이었다(사실 문젠베르크의 책들은 실제 저자가럼 그의 참모 중 하나였고, 이 경우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인 오토 카츠였다). 오늘날 이 책은 역사가들이 광범위하게 참고하고 있다.
한 돌격대원의 폭로와 사건의 재구성
화재 발생 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화재 발생 시간인 9시 14분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경찰과 소방대는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 전체로 흩어져 있는 점에 놀랐다. 연기를 내지 않고 치솟는 불기둥도 있었다. 경찰과 소방대는 이 불길이 인화재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판데르뤼버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주변 정황 또한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했다.
2월 22일, 화재 발생 5일 전에 괴링은 SA를 보조 경찰로 격상시켰다. 경찰과 늘 대립 관계였던 SA와 SS(아직 SA의 하부조직이었다)가 경찰을 지원하는 반(半) 국가조직이 된 것이다.
또 화재는 선거 기간 중에 발생했다. 정확하게는 선거 1주일 전이었다. 2월 10일, 괴벨스는 선거 기간 중 유세 활동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히틀러는 비행기까지 동원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유세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계획서에는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아무런 계획이 잡혀있지 않았다. 특히 27일에는 아무런 연설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못을 박아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건 후인 1933년 3월, 노이루핀에서 "라르"라는 이름의 SA 대원이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라르는 판사에게 지난 2월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언급하며 폭로하지 않는 대가로 강도죄를 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입회 서기인인 라이네킹이 이 사실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했고, 이 사실은 게슈타포에 통지되었다. 게슈타포는 즉시 라르를 체포했고, 수일 후 라르는 어느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주장한 사건의 전말은 2월 어느 날 밤, 돌격대 사령관 에른스트 룀의 충복인 카를 에른스트가 지휘하는 호위대에서 10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라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2월 27일에 국회의장 공관으로 가서 대기했다. 당시 국회의장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오후 9시, 에른스트가 그들을 이끌고 의사당으로 가는 통로를 통해 의사당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방화 연료가 들은 통을 2~3개씩 지급받았고, 그날 밤 9시에 에른스트의 신호로 일제히 불을 질렀다. 10분만에 작업을 마친 그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그 다음에 판데르뤼버가 주머니에 성냥 및 점화재료를 소지한 채 의사당으로 들여보내졌다는 것이다. 이 음모에는 요제프 괴벨스가 아이디어를 냈고, 헤르만 괴링이 협조했으며, 실무 지휘는 룀의 수하인 에른스트가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라이네킹이란 서기관은 잽싸게 게슈타포에 알림으로써 초고속 승진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비밀리에 사살당했다. 카를 에른스트는 룀 숙청 사건 당시 총살되었고, 라르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도 룀 숙청 때에 암살되었다고 한다.
재판 이후 에피소드
* 내무장관 자격으로 증인으로 소환된 괴링은 디미트로프와 한판 설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설전에서 괴링은 완전히 디미트로프에게 패했다. 또, 괴링은 자신이 보는 족족 없애버렸던 반나치집단의 역재판 관련 문서를 검사가 뒤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 3명의 불가리아인들은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이듬해까지 계속 감옥에 억류되었다. 재판정에서 괴링은 디미트로프를 향해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계속 구금할 것이라고 소리질렀다.
* 판데르뤼버의 가족들이 판데르뤼버의 시신을 요구했지만, 끝내 시신은 가족에게 보내지지 않았다.
* 나치는 두 번 다시 이번 라이프치히 재판같은 정치 쇼는 벌이지 않게 된다. 단,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들을 재판한 것만은 피고인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름에 담아 공개하는 쇼를 벌였다.
* 에른스트 텔만 다음의 2인자였던 토르글러는 이후 나치로 전향하였다(그 조건으로 그는 석방되었다).
* 행동대장 에른스트를 비롯하여 이 음모에 가담되었다고 믿어진 돌격대원들 중 일찌감치 제거된 라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1934년 룀 숙청 사건 당시 조용히 제거되었다.
*
* 고백교회
* 마르틴 니묄러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1952년 모습
본명: 프리드리히 구스타프 에밀 마르틴 니묄러
로마자 표기: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출생: 1892년 1월 14일
사망: 1984년 3월 6일
성별: 남성
국적: 독일
경력: 국제전쟁저항자모임 부회장
직업: 루터교 목사, 반나치 운동가
소속: 고백교회
종교: 루터교
애초 니묄러는 민족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고, 아돌프 히틀러의 지지자였다. 하지만 성향을 바꿔 나치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의 설립자 중 한 명이 됐고, 나치에 물든 독일의 개신교를 비판했다. 또한 니묄러는 아리아인 조항과 같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격렬히 반대했고 이런 활동 덕에 그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갇혀 있었다.
나치 독일이 패전한 이후 그는 평화주의자자 반전주의자로 활동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제전쟁저항자모임(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부회장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기간에는 호치민을 만나기도 했다. 또한 비핵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 그러나 동독에 방문중일 때 동독 정권이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와 관련해서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는 등 동독 옹호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출처 필요]
개신교
그리스도교의 한분파:
개신교는 여기로 연결된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교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바람.
개신교(改新敎) 또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16세기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교회의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1]통해 생겨난 기독교의 한 전통이다.
11세기 교회 대분열로 공교회(보편교회) 중심이었던 지금의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후 16세기 서방교회 내에서 종교 개혁 운동의 '반대파'인 천주교회와 '찬성파'인 신교가 분리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가장 주된 종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정통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장로교,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가 있다. 감리교, 오순절교회, 성결교회는 추후에 생겨났다.
목차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개요
16세기 서방교회의 사회, 정치적 문제로 인한 개혁, 즉 종교개혁 요구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을 찬성하고 주도한 성직자들이 '개신교회'로, 서방교회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기존 제도를 지지한 성직자들은 '천주교회'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루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나, 사실 10세기 창부정치에 대한 비판, 12세기 정치화한 서방교회에 대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화 운동, 14세기 아비뇽 유수 사건 비판 등으로 서방교회 개혁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5세기와 16세기 서방교회의 심각한 문제로 인해 루터 전후에 다양한 지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신교는 초창기에는 특정 교파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을 다시 회복하고 '복음'을 교회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변혁 활동으로 서방교회 내부의 기독교 운동이었다.
유럽지역에서 유럽 본토인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지역에서는 개혁반대파 전통고수의 교황중심주의자들이 '복음주의'[2]로 개혁 찬성파들의 주장을 지적하며 찬성파를 '복음주의자'로 칭했으며, 현재도 유럽 본토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개신교회 전체를 의미한다. 영국 지역에서는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와 연계된 정치제도에 '항의(Protest)'하며 등장한 모든 운동과 전통을 가리키며 항의자를 뜻하는 '프로테스턴트'(protestant)로 칭하였고, 영어권에서 현재 개신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개신교회의 전통은 종교개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복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온건적 개혁과 급진적 개혁의 주장이 등장하였다. 온건적 개혁의 '개선주의' 신학과 급진적 개혁의 '재건주의' 신학의 흐름이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차 구분되었다. 종교개혁 초기 시절에 초대 교회와 공교회의 전통을 따라 서방교회의 전통의 잘못을 개선하고자 하는 '개선주의' 신학으로 루터를 따르는 루터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 교회와 공교회 전통을 강조하며 서방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재건주의' 신학에서 츠빙글리, 칼빈 등을 통해 '개혁교회'와 급진적 재건주의인 '재세례파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후 개선주의 신학적 교단으로 루터교회를 필두로 성공회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구세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 형성되었고, 재건주의신학적 교단으로 개혁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퀘이커 교회, 메노나이트 교회 등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주요 교단 형성의 신학적 배경 이외에도 시대적인 신학적 흐름과 변화인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오순절주의,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같은 흐름들도 모두 개신교 전통에 포함된다.[3] 이처럼 정교회나 천주교에 비해 다양한 흐름들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분류/합류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개신교 내의 교파 분열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복잡하지만, 대체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4],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성직 구조나 정치제도 보다는 만인 제사장설을 따르는 성직 이해와 그에 따른 교회제도인 감독제(루터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5]와 원로제(개혁교회 장로교회 등), 회중제(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다양한 교회제도를 채택하였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성례전에 대한 반대(천주교회는 세례, 성체, 고백, 견진, 혼배 등 7개, 개신교의 성례전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만찬, 세례 2개이며 그 외는 예식임)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개신교회의 전통
개신교회의 신앙고백은 믿음의 새로운 조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 증언된 복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방법이므로[6] 서방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보편교회 신학적 전통을 성서에 비추어 올바른 교리와 제도를 재조명하였고 서방교회 전통 중 성경에 따르지 않는 조항은 폐기하였다. 초대교회와 보편교회의 신앙고백과 서방교회 전통 중 개신교 신앙고백에 따라 새롭게 조명된 교회 전통과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역할을 개신교회의 전통으로 본다. 교회구조 이해, 성찬식의 변화, 교회학교, 성경 연구, 사회운동에서 사회제도까지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적 사안인 교회 전통으로만 좁혀서 종교개혁 신학, 성찬 예식, 교회 구조, 성직자 이해, 성경 연구만을 범위로 살펴본다.
개신교의 종교개혁 신학
서방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종교개혁신학이 16세기에 나타났으며, 종교개혁 신학은 복음을 교회의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복음주의로 발전하였다.
이 복음주의적 개신교 신학은 양대 축인 개선주의와 재건주의 개신교 신학 전통으로 형성되었다.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초기에 형성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은 서방교회를 위한 '개선주의' 신학이었고, 개선주의 신학을 수용하여 스위스 중심으로 형성된 츠빙글리와 칼뱅의 종교개혁 신학과 재세례파 신학은 서방교회를 위한 '재건주의' 신학으로 발전하였다.[7][8]
서방교회 개혁에 대한 신학적 개선주의는 서방교회 신학전통에서 공교회(보편교회) 전통에서 벗어난 사항을 제거하고, 서방교회 전통에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요소를 바르게 잡고자 하는 신학 전통[9]으로 흔히 개신교 '공교회주의'(보편교회주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신학적 재건주의는 11세기 이후 형성된 서방교회 신학전통에 비기독교적 요소가 너무 많아서 개선보다는 초대교회와 7세기까지의 보편공의회를 따라 새로운 공동체로서 재형성하여 재건하고자 하는 신학전통[10]으로 흔히 '개혁주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개선주의 즉 개신교 공교회주의 신학의 영향은 루터교회에서 성공회교회, 감리교회, 구세군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의 교단으로 형성되었고, 재건주의 즉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은 개혁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퀘이커교회, 메노나이트 교회 등의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교회구조
개신교회의 등장으로 서방교회에 계급적 교회구조에서 공교회구조의 재조명, 새로운 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계급적 획일성을 벗어난 다양성을 지닌 기독교 교회가 나타났다.
공교회 구조의 재조명, 서방교회 즉 로마교회의 절대적 계급주의의 교회구조에서 벗어났다. 종신제가 아닌 감독(주교)과 대감독(대주교)이 임기제인 연합구조의 교회조직을 강조하는 공교회구조로 재조명하였다. 초기 종교개혁 교단이었던 루터교회와 영국성공회는 전통적 공교회제도를 수용하며, 절대적 대감독(대주교)이 아닌 연합적인 공교회(보편교회) 구조의 교회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였다. 이는 이후 등장한 감리교회나 구세군, 오순절 교회에서도 감독들은 임기제로 선발되고, 공교회 감독의 임무를 따라 수행하는 초대교회의 구조를 재형성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교회구조로 원로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원로나 장로를 선발하여 그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소명이 있는 이가 목사의 역할을 하는 원로구조의 교회 구조가 칼뱅에 의해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 일부 등에서 이를 따라 교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회중제도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영국성공회의 정부 중심 제도적 교회가 공교회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더욱 신도들의 모임인 회중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회중을 중심으로 회중 가운데 원로 또는 장로를 선발하여 목사의 역할을 맡기는 구조의 회중제도 교회가 시작되었고,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스도교회 등이 이런 구조를 따른다.
성찬 예식의 회복
성찬은 개신교회에서 공교회 전통인 상시적 예배 예전, 즉 매주 또는 매달 한번 이상 행하는 예배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성찬을 성도의 모국어로 집례하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말씀의 성례와 함께 성찬의 성례는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공교회 전통을 되살린 개신교회의 성찬은 동일한 성도인 성직자와 신자가 함께 마주보며, 매주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예전이 되었다. 공교회의 성찬에서 멀어졌던 서방교회의 기존 성찬은 11세기 이후 교황과 직계를 이루는 계급적 성직자로 이뤄진 로마교회에서 계급적 방식으로 변화하였고, 철저한 성직자 중심의 예식으로 변화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천주교회의 성찬 예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예수를 대신'(alter Christus)하는 행위가 사제에 의하여 십자가만 바라보는, '신전의식'(코람 데오) 형식으로만 신자들과 함께 봉헌되었고, 집례 도중에 몇 차례만 성도를 향하였다.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도와 성직자가 동등하게 참여하고 나누는 상시적 예전으로 회복하였다.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부터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직자와 성도가 알아듣는 해당 지역 언어로 진행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어 먹고, 성찬 예전을 거행하는 동안에도 성직자는 예배당 십자가를 등에 지고 성도들 향해 서서 성찬 예전과 축사를 하였고, 마칠 때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았다. 이는 개신교회의 전통이 되어 성찬 탁자에 십자가가 놓이고, 포도주와 빵이 놓이는 모습의 개신교회 성찬대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다양한 형식의 성찬 예전이 풍성하게 발전하였고, 성찬 관련 목회신학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이후부터 성찬을 회복하기 위해서 16세기 참으로, 실재로, 또 실체적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의 몸을 모시는 천주교회의 성찬 방식을 거부하고, 복음을 전하는 예배로서 성찬과 성도의 요청에 의해 성찬예전을 상시적으로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대부분 교단은 성찬을 한 달에 한번 이상을 요구하며, 매주 거행할 것을 요구하는 교단도 있다. 이로 인해 성찬의 변화와 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고, 예배당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 성직자가 언제나 거행할 수 있는 예배가 되었다. 현재도 개신교회의 일부 교단에는 성도들이 성찬을 요청할 경우에는 성직자는 성찬이 포함된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천주교회는 이런 개신교회의 성찬 예전의 변화를 인식하고, 수용하였다. 19세기 제 1차 바티칸회의에서 매주 성찬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천주교회는 20세기 제2차 바티칸회의에 와서야 성찬에서 성도들을 바라보는 '군중을 향하는'(coram populo) 형식으로 변경하였고,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성직자 이해
개신교회의 성직자는 목사[11]이다. 성직자의 이해는 10세기 이전부터 서방교회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에는 귀족과 유사한 지위를 누렸으며, 성도와 성직자는 엄격한 계급적 관계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개신교회의 성직자인 목사는 만인제사장의 정신에 따라 성도와 평등적 관계의 시각에서 시작된 성직자 이해이다.
개신교회는 교회내 계급적 관계를 반대한다. 성직자인 목사는 동일한 성도로서 그 직분은 거룩한 사명이라고 인식한다. 이 사명에 대한 관점이 교단마다 차이가 있으나 성도와 목사는 계급적 관계가 아니라, 현대적 개념으로 설명하면 면허나 직무 자격의 차이로 인식한다. 온건적 만인제사장 개념의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병원의 의사처럼 일정한 과정과 시험, 수련으로 의사만이 치료를 하는 면허를 지니는 것처럼 목사의 면허를 지닌 것으로 본다. 급진적 만인제사장 개념의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목사는 변호사처럼 전문적 자격을 획득하는 자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절대적 신분제도를 거부하는 평등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하느님 앞에서 누구나 동등한 하느님의 성도이며, 똑같은 피조물임을 밝히는 성직자 이해이다.
성서연구
서방교회는 16세기까지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교회전통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를 보였다. 교리와 칙령에 따라 규정된 규범을 따른 교회법이 뿌리를 두는 전통을 강조하였다. 공의회등지에서 결의된 사안이였기에 초대교회부터 전해지는 역사적 성경해석이 교황의 해석과 그를 따르는 교회 학자의 해석과 교리를 따르는 알레고리 성경해석에게 대부분 대체되었다.
개신교회는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발전시키고 이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교회의 문을 열었다.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전통적 복음주의 사상을 뿌리로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성경을 기존 교리신학, 즉 조직신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고, 교리의 증빙자료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성경 자체가 전하는 복음을 찾고자 성서 저자의 의도와 작성된 시대, 시대배경, 본문의 구조 등을 연구하여 성경이 직접적으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교리신학의 일부였던 성서연구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문헌과 본문연구, 역사적 배경, 문체, 구조를 연구하는 다양한 성서 연구 기법이 나타났으며, 깊이 있는 현대의 성경 해석, 성경 주석의 핵심적 이론과 방법이 개신교회의 성경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천주교회의 일부 연구와 정교회의 대다수의 성서연구 역시 개신교회가 형성한 성경연구 기법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다양한 연구 교류가 교파를 넘어 이뤄지고 있다.
개신교의 기원과 용어
'개신교(改新敎)'라는 표현은 고칠 개(改)와 새롭게 할 新을 쓴 한자어 표현 즉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한 표현이다.
개신교도를 16세기에 칭하던 용어인 '복음주의자',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개신교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는 '에반겔리세'(Evangelische)라는 용어는 개신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16세기 전통 복음주의와 19세기에 영미의 보수적 개신교회가 중도 및 진보적 개신교회와 분리하기 위해서 자칭하는 용어에서 등장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서 주장하는 복음주의[12]와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의 의미)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독일의 슈파이어(Speyer)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Reformation)이 1517년에 시작되었다. 1529년 증오심을 가진 가톨릭 실세들과 독일 제국의 일부 군주들이 슈파이어에 모여 제국 의회를 열고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의 활동을 복음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제국회의의 의회의 지침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지칭하며 사용했고, 이 활동을 금지하는 행위로 포고문에 기록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 치하에서였다. 슈파이어 의회(Diet of Speyer)의 명목상 목적은 터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키 위해 모인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추종자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13]
복음주의자, 즉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은 종교개혁가들을 핍박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칼 5세에게 교황파, 즉 종교개혁 반대파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김현배에 따르면 제국 의회는 더 이상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면서,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또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1521년 5월 ‘보름스 칙령’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에 루터의 추종자들은 다수의 가톨릭파에 의해 결정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의사항을 반대하였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 역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판단했으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루터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1526년 의회 결정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1529년 4월 25일,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칼 5세의 종교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해 황제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항의한 사람들은 “Protestant”(항의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것이 현재 영어권과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되었다. 당시 항의서에는 작센의 선제후 요하네스, 헤센의 영주 필립,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의 게오르크, 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안할트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14개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이다. 14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켐프텐, 뇌르들링엔, 하일브론, 이스니, 생 갈렌, 로이틀링엔, 바이센부르크, 빈추하임, 멤밍엔 등이다.[14]
'Wälbs > 함께 펼쳐보는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 주요국, 아랍이 지원하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재건 계획 지지" (0) | 2025.03.12 |
---|---|
진실왜곡 독일공영방송의 다큐 "인사이드 코리아- 중국과 북한 그늘 아래의 국가위기"에 대한 항의문 (1) | 2025.03.09 |
폴란드 레크 웨일사 전 대통령의 서신 (0) | 2025.03.05 |
우크라 ..., 이제 유럽으로 넘어간다. (0) | 2025.03.05 |
트럼프의 젤린스키 TV Show 연출에 대하여 설왕설래다. (1) | 202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