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기계 그리고 의미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참으로 잔인하다. 저자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실화를 써내려갈 때의 악몽의 재현에 대한 고통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는 실상의 곤혹스런 재현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치유와 망각의 길로 가는 길임에는 틀림없다. 저자가 실화를 남김으로써, 자신에게 닥쳤던 끔찍한 경험을 정리하고 그에 힘입어 인간을 쾌락의 원칙을 넘어, 지배와 권력의 의지를 넘어,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로 규정한 로고 테라피(logotherapy)를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아우슈비츠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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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이자 특별한 사람이자 선택받은 자이기도 하다. 이때 선택받았다 함은, 인간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신의 은총이나 독일의 항복이라는 정치상황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 자신에게 잠재된 생에 대한 맹목적이고 의식적인 의지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이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댐으로써 죽음을 향해 간단히 날아갈 수 있었지만, 수용소라는 지옥의 굴욕과 억압에 복종한 것은 그들이 영원한 굴욕과 억압이 아니라 삶으로의 출구로 나아가고자 함이었던 것.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허무주의자도 냉소주의자도 아닌, 자기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 있으려고 하는, 감시원이 수감자를 경멸하여 명명한 그대로 "돼지"였다. 수용소 지역 한 켠에서, 가스비가 내리는 엄혹한 시절에, 영양실조에 걸린 앙상한 돼지의 형해(形骸)로 살다 죽는 것은 어쩌면 크나큰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내일이 없는 돼지의 운명을 피해 치욕적인 생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친구를 팔거나 교활해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철저히 생각하는 기계로 움직인 사람들이었다. 실낱같은 삶의 의지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도구화하였고,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선의를 캐내려고 역발상을 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을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객관화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톱니로 전화시켰다. 반면 사망자들은 고통에 대한 증오와 삶에 대한 의지 상실로 신체적 약화를 가져와 죽어서 수용소를 나갔다.
광기의 시대에 생사의 갈림길은 그렇게 갈렸다. 여기서 산 자들을 찬양하기 위하여 죽은 자들을 경원시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외부의 감옥설계자에게 생사여탈권이 주어진 악랄한 조건 하에서, 선량한 수인에 대한 수명의 장단(長短)을 논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악폐에 동조하는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자살자가 많은 것은, 그 우울한 결말과 상관없이, 그들이 감옥 밖에서도 끊임없이 자기의 삶 그리고 기억과 투쟁했다는 증거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은 참으로 오만하다. 생의 비극을 비극으로 끝내고자 할 때 그의 말은 무시되어도 좋다. 어차피 삶의 최종 결정자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을 다시 한번 갈망할 때 그의 말은 금언으로 피부 깊숙이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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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나치 수용소 체험수기를 남긴 정신과 의사, 빅터 E.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빈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다카우와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1924년 국제심리분석학회의 잡지에 글을 발표한 이후, 2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버드, 서든 메더디스트, 스탠포드 및 듀쿼슨 대학교의 초청교수로 강의했으며, 로욜라 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빈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오스트리아 심리의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오스트리아 과학학술원의 명예회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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