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일제 강점기에 있어서의 독립 운동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11. 24. 22:07

9.

 

우리 겨레는 일제의 무단 통치로 말미암아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독립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로, 일본 Tokyo에서 유학생들이 2. 8 독립선언 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1 운동은 온 민족의 독립 결의를 국내외에 선언한 평화적 투쟁이며, 침략자 일제로부터 우리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세계 만방에 호소하는 독립만세 시위였다. 이제부터 그 이후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9.1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이때까지 여러 곳에서 주도해 오던 독립 투쟁을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국내외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 곳에 세워진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하였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당시의 상하이는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외교 활동을 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으므로, 독립 투쟁을 하는 데에는 알맞은 지역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한 곳에 모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다. 비록 해외에 자리잡은 임시 정부였지만, 온 겨레의 지지를 받고, 또 국내외의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하나로 통일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대일항쟁을 펴 나갔다. 또한 연통제를 통하여 국내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내외의 동포에게 독립 운동의 소식을 알려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독립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9.2 애국지사들의 투쟁

 

3.1 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방식이 변화하는 속에서, 국내외의 독립 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애국 지사들은 일제의 교활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투쟁을 과감히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총독부와 각지의 경찰서, 그리고 경제 착취기관인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폭파, 파괴하는 의거가 잇달아 일어났다.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본 국왕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며,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인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이와 같은 의거는 우리 민족의 강한 애국정신의 표현으로서,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9.3 독립군의 항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에,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펴 나갔다.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의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 서로 군정서와 연해주 지방의 혈성단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독립군 부대 중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작전을 펴서 일본군 및 식민 통치기관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는 부대도 있었다.

 

9.3.1 봉오동. 청산리 전투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군의 활동은 1920년을 전후로 하여 크게 활기를 띠어 갔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러한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를 크게 격퇴시켜 대승리를 거둔 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였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큰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려고 대한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알아채고, 대비하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대승하였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그 후, 일본군은 더욱 규모가 큰 군대를 만주에 보내어 독립군을 공격하면서, 만주에 있는 우리 동포를 마구 학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 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연합 부대는 청산리에서 일본 대부대를 맞아 6일 동안 계속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독립군 전사상 길이 빛나는 청산리 대첩이다. 이때 우리 독립군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전 분투하였을 뿐 아니라,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협력을 얻고, 또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독립군의 활약이 커지자,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자유시 참변 등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항일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9.3.2 독립군의 재정비

자유시 참변 후, 만주 각 지역의 독립군은 항일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펴기 위하여 여러 독립군 단체의 통합 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통합되어 항일 독립 투쟁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들 3부는 단순한 항일 독립군 단체가 아니라,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기반으로 하여 설립된 자치 정부의 성격을 띤 것이다.

그 후 1920년대 후반에 와서는 3부 통합 운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 경찰이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을 습격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자, 독립군은 일제의 침략을 막으려는 중국 군대와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펴 나갔다.

이러한 한.중 연합군의 활약은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독립군의 활약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부는 국경지대에서 활약하고,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9.4  실력 양성 운동

 

3.1 운동 이후, 일제의 침략 정책이 민족의 이간과 경제 착취의 강화로 굳어 가자, 민족 운동은 이에 대항하여 경제적,사회적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산업의 육성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물산장려운동에서는 자급 자족, 소비 절약, 국산품 애용 등을 내세웠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착취가 심해지면서 소작 쟁의, 노동 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는데, 이것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경제적 독립운동이었다.

이 무렵 국내 지식인층 사이에서는 항일 운동단체의 통합 기운이 일어나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당시의 민족 운동가들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단체로서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단결을 주장하였고, 기회주의자들을 배격하였다.

 

9.5 민족 문화 수호 운동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뜻있는 민족 지도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즉 국학, 언론, 교육, 종교, 문학, 예술 활동 등을 통해 주체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데 힘썼다.

 

9.5.1 언론 활동

3.1 운동 직후 일제의 회유 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언론, 출판 활동이 허용되어 조선 일보, 동아 일보 등이 창간되었다.

이들 민간 신문은 일제의 악명 높은 검열 제도에 저항하면서, 민족사상의 고취, 민족의사의 대변, 민족문화의 계승, 재난 동포 구호 등의 운동을 폈다. 특히 한글의 보급, 문맹(文盲) 퇴치 등의 계몽 운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이들 언론기관은 일제로부터 기사 삭제, 신문 압수, 언론인 구속, 발간 정지 등의 탄압을 계속 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50년경에는 모든 우리말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고 말았다.

 

9.5.2 국학 연구

민족의 문화 투쟁은 국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나라를 철저히 지배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 풍속 등을 조사하였는데 고의로 우리 문화를 나쁘게 평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놓았다. 그래서 국어와 국사 등의 민족문화를 연구함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운동이 일제의 그릇된 한국학 연구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먼저 국어 연구에서는 조선어 학회가 중심이 되어 한글의 연구와 보급, 한글 사전의 편찬, 맞춤법(Rechtschreibung)과 표준어의 제정은 큰 업적을 남겼다. 또 한글날을 제정하여 민족 문화의 선양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국사연구에 있어서는 민족의 전통과 긍지를 살리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민족사 연구를 해 나갔다. 한편 일본 어용학자들의 왜곡된 한국사 연구에 반발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학운동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구실로 삼아 국어 학자들이 압박을 받았고, 진단 학보도 폐간되어 마침내 국학 연구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9.5.3  민족 교육 운동

일제의 식민정책이 추진되면서 우리의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 즉 일본의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이에 순응하게 하는 교육을 강요당하였다.

이에 뜻 있는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의 장래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어 야학, 서당, 강습소 등을 많이 개설하여 교육활동을 펴는 한편, 사립 학교 설립에도 힘썼다. 이들 학교에서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우리 나라의 글과 역사를 가르쳤으며,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주력하였다.

 

9.6 한국 광복군

 

9.6.1 한국 광복군의 창설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이끌어 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활동을 계속하여 나갔다

중일전쟁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자, 우리의 임시 정부도 그곳으로 옮겨가면서 정부의 기구를 전시체제로 정비하였다.

한편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다수의 독립군 지도자들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한국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우리 청년들은 물론 일본군대로 끌려나갔던 우리 청년들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독립을 위해 싸웠다.

9.6.2 대일 선전 포고와 한국 광복군의 활동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투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임시 정부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즉각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손을 잡고 항일 독립 전쟁에 나섰다. 이때 임시 정부는 멀리 인도, 미얀마(버마) 전선에까지 한국 광복군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싸웠다.

한편 한국 광복군은 중국에서 미군으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아 가며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독자적인 전투도 치뤄보지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직접 싸워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였기 때문에 광복은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9. Koreas Unabhängigkeitsbewegung unter der japanischen Besetzung

 

Das koreanische Volk wurde während der Besetzung durch die Japaner stark unterdrückt. So kam es zur Unabhängigkeitsbewegung. Am 8. Februar 1919 legten koreanischen Studentinnen in Tokyo eine Unabhängigkeitserklärung vor. Am 1. März desselben Jahres kam es landesweit zu Protestbewegungen gegen Japan. Koreaner erklärten sich unabhängig von Japan und versuchten somit, ihre Autonomie wiederzuerlangen. Welche Folge hatte nun die Unabhängigkeitsbewegung für die weitere Geschichte Landes?

 

9.1 Gründung und Tätigkeit der Provisorischen Regierung der Republik Korea

 

Die Unabhängigkeitserklärung vom 1. März 1919 brachte den Koreanern die Erkenntnis, daß man eine Regierung braucht, um den Unabhängigkeitskampf besser zu organisieren. Im Folgenden wurden provisorische Regierungen in Korea selber und im Ausland gegründet. Später vereinigte man diese zu einer einzigen provisorischen Regierung, ihr Sitz wurde Schanghai, ihr Präsident 이승만. Bereits bestehende diplomatische Kreise in Schanghai erleichterten die diplomatische Aktivität. Außerdem war die Gefahr, daß die Regierung unter japanischen Einfluß geraten wurde, hier sehr gering. Schanghai war somit ein idealer Ausgangsort für die weitere Unabhängigkeitsbewegung. Die Provisorische Regierung in Schanghai erfuhr Unterstützung von der Mehrheit des koreanischen Volkes. Sie bestärkte Koreaner im In- und Ausland in ihrem Vorhaben.

 

9.2 Blutiger Kampf für ein unabhängiges Korea

 

1909 ermordete 안중근 in der Mandschurei Ito Hirobumi. Letzterer war eine wichtige Person bei der Besetzung Koreas von den Japanern. Desweiteren wurde der Amerikaner Stevens, der ein Anhänger der japanischen Expansionspolitik war, von 전명운 in San Francisco erschossen. In Rahmen der Unabhängigkeitsbewegung fanden weitere Attentate statt: z.B. auf die Vertretung der japanischen Regierung in Korea und japanische Polizeiämter in verschiedenen Orten Koreas. 김상옥 bombardierte 종로-Polizeiamt, 이봉창 versuchte einen Mordanschlag auf den japanischen Kaiser und 윤봉길 warf Bomben über dem Hungkeu-Park in Schanghai ab, wodurch zahlreiche hohe japanische Beamte zu Tode kamen. Die oben genannten Attentate waren Ausdruck der starken Vaterlandsliebe des koreanischen Volkes und hinterließen einen tiefen Eindruck bei den Koreanern und den Chinesen.

 

9.3 Widerstand der koreanischen Armeen

 

In der Zeit der Unabhängigkeitsbewegung leisteten koreanische Militärs im Ausland Widerstand gegen die Japaner, so z.B. in der Mandschurei und der Seeprovinz. Truppen zogen über den 압록강- und 두만강-Fluß ins Innere Koreas, wo sie die japanische Armee und japanische Behörden und Institute angriffen.

 

9.3.1 Der 봉오동- und der 청산리-Kampf

1920 erreichte die Aktivität der koreanischen Armeen ihren Höhepunkt. Japan sandte Truppen ab, um Angriffe abzuwehren, doch bisweilen waren die Koreaner dennoch erfolgreich. Ihre beiden wichtigsten Siege sind der 봉오동- und der 청산리-Kampf. 홍범도 leitete die 대한 독립군-Armee und zog in Korea ein. Die Japaner planten einen Angriff auf das Hauptquartier der Armeen in 봉오동. Dies wurde von koreanischer Seite jedoch rechtzeitig durchschaut, und so gelang es, die feindlichen Truppen zu schlagen(봉오동-Kampf).

Den Japanern gelang es, zwei Divisionen zu mobilisieren und zum zweiten Mal anzugreifen. Doch 김좌진, der Kommandeur der 북로 군정서-Armee, lockte sie in eine Bergschlucht bei 청산리, wo er sie nach einwöchigem Kampf besiegte. Man schätzt, daß 3300 Japaner in dieser Schlacht ums Leben kamen(청산리-Kampf).

 

9.3.2 Reorganisation der koreanischen Armeen

Die japanische Armee unterdrückte die in der Mandschurei lebenden Koreaner, und dennoch wurde der Widerstand der koreanischen Armeen fortgesetzt. Um noch effektiver vorgehen zu können, vereinigte man die einzelnen Armeegruppen zu drei Armeen :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Sie hatten den Charakter von Regierungen und wurden von den in der Mandschurei lebenden Koreanern anerkannt und unterstützt. Japan griff die Mandschurei an, gründete dort einen eigenen Staat (Mandschureistaat) und eine eigene Regierung. Die Koreaner verbündeten sich mit den Chinesen und setzten den gegenjapanischen Angriff gemeinsam fort. Der chinesisch-koreanische Zusammenschluß hatte viel Erfolg, so daß die japanischen Truppen ebenfalls noch massiver vorgingen. Dies hatte eine weitgehende Einschränkung der Schlagkraft der koreanischen Armee zur Folge. Fortan kämpfte ein Teil ihrer Truppen im chinesisch-koreanischen Grenzgebiet, ein zweiter im Inneren Chinas.

 

9.4 Förderung der Bildung des nationalen Kapitals

 

Mit der Unabhängigkeitsbewegung verstärkten die Japaner auch die wirtschaftliche Ausbeutung Koreas. Die Koreaner versuchten nun, ihre Wirtschaft gezielt zu fördern. Man propagierte den Verbrauch ausschließlich eigener Produkte und rief zur Sparsamkeit auf. Ab 1920 verstärkten die Japaner die wirtschaftliche Ausbeutung. Sowohl in landwirtschaftlichen als auch in industriellen Produktionsbereichen kam es zu Streiks. Koreaner verweigerten die Arbeit, weil Großgrundbesitzer und Fabrikbesitzer fast ausnahmslos Japaner waren. Zu dieser Zeit wurde 신간회, ein Institut, gegründet, in dem sich Liberalisten und Sozialisten erstmals zusammenschlossen, um für ein gemeinsames Ziel, die Autonomie des Landes, zu kämpfen. Der Ruf nach Solidarität, politischem und wirtschaftlichem Erwachen wurde immer lauter.

 

9.5 Bemühungen, koreanische Kultur zu erhalten

 

Die japanische Invasion war fast gleichbedeutend mit der Auslöschung der koreanischen Tradition und Kultur. Folglich gab es auf koreanischer Seite das Bestreben, disem Vorgang entgegenzuwirken.

 

9.5.1 Forschung der Koreanistik

Japan erforschte Geschichte und Tradition Koreas mit dem Ziel, das Land zu kontrollieren und die koreanische Geschichte gezielt zu verfälschen. Um dem etwas entgegenzusetzen, wurde von den Koreanern das 조선-Sprachinstitut gegründet, das gezielt die koreanische Sprache(한글) erforschte und Rechtschreibung und Hochsprache festsetzte. Das Institut führte auch den 한글날-Feiertag(9. Okt) ein.

 

9.5.2 Bildung von Schulen

Die koreanischen Schüler wurden zur Anpassung an die japanische Politik gezwungen. Von koreanischer Seite aus wurden daher Abendschulen, private Schreibschulen und Ausbildungsanstalten gegründet. Hier wurden koreanische Schrift sowie Geschichte gelehrt, und man versuchte, den Schülern koreanisches Nationalgefühl zu vermitteln. Natürlich mußte all dies unter höchster Geheimhaltung stattfinden.

 

9.6 Korea-광복군

 

Die Provisorische Regierung Koreas setzte den Kampf um Unabhängigkeit fort. Nachdem die bewaffneten Kämpfe in der Mandschurei schwierig geworden waren, zogen die Armeen ins Innere Chinas. In dieser Situation gründete man Korea-광복군(1940).

Mit dem Beginn des Pazifikkrieges, erklärte die Provisorische Regierung Japan den Krieg und schlug sich auf die Seite der Alliierten.

Die 광복군-Armee wurde von Amerikanern in China angelernt und plante, in Korea einzumarschieren. Doch die japanische Kapitulation beendete den Krieg, bevor es dazu kam und führte so auch zur Befreiung Koreas. Aufgrund dieser Umstände wurde Korea in zwei Besatzungszonen aufgeteilt, die nördliche unter sowjetischer, die südliche unter amerikanischer Verwaltung.

Auf weitere Einzelheiten der amerikanischen Besatzungspolitik in Südkorea wird in der nächsten Stunde eingegangen we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