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Di/하느님 뜻 받들기

"나를 죽이면 영광스런 그날에 살리라"

행복나무 Glücksbaum 2009. 9. 28. 10:55

 베드로전서 4, 7- 11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의와 지조는 생명처럼 귀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믿고 지켜야할 도리를 다하며 올바른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존하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신의와 지조는 생명보다 더 귀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직하기 신신하신 분으로써 심지가 견고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 삶의 조건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크고 지존하신 하느님은 완전한 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신실한 자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경과 형편 속에서도 오직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목숨을 바쳐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계절이 변하여도 언제나 푸른 모습을 간직하는 소나무처럼 하느님을 향한 푸르른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신실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사를 초월한 믿음의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더구나 목숨을 버리기까지 신앙의 전래를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의로운 빛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 반드시 사람들이나 세상으로부터 찬사와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 곧 하느님께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좇으므로 해서 현실적으로 엄청난 불이익과 억울한 누명과 욕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사람 다니엘이 세상의 권력을 좇아야 했다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온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며 부러워하는 부귀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황제 다음가는 막강한 권력과 부와 명예가 있었지만 하늘의 큰 뜻을 위해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내 뜻을 앞세우기보다 하느님의 큰 뜻을 선택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에게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지만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십자가에 죽은 자였음을 온 몸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 땅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각 방면에 하느님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의를 위해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왔습니까?
 
하느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는 삶은, 매일 매 순간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선택하여 따르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행동이어야 하고, 실제적인 삶이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오늘 이 땅에는 다니엘과 같은 하느님의 신실한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하느님나라 독립투사’들이 이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막강한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풀무 불에 몸을 내던진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자기 생명을 던져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의뢰하는 삶을 선택 했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이것이 신앙인에게 있어서 꼭 본 받아야할 신실한 신앙생활의 본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영광을 위해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허무하고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부귀 권세를 위해 무릎 꿇는 것은 팥죽 한 그릇에 자기 영혼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그래서 에서와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인생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명을 위해 비굴하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의와 진리를 위해 죽고자 하면 살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선택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28. September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