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Sag mal, Was ist denn los?

저항과 평화운동의 등대, 만델라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2. 12. 10:08

 

 

 

넬슨 만델라의 삶은 인류사에서 유례없는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투쟁사의 역정을 대변한다.

그는 1만일(27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저항운동의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가 체포됐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이들이 그를 해방의 구심점으로 떠받들어 놀라운 변혁을 이루어냈다.

 

90년 2월 감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그는 온 세계가 지켜본 석방연설 말미에서

저 유명한 보니아 재판의 최후진술을 다시 낭독했다.

 

"나는 백인 지배에 저항해 싸웠습니다. 흑인 지배에도 대항해 싸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 속에서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신뢰를 이상으로 간직해 왔습니다.

이 이상을 위해 살고 이것을 이룩하고 싶습니다.

필요하다면 이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도 돼 있습니다."

 

그를 세계적인 정치투사로 만든 이 선언이 여전히 자신의 진실임을 확인한 것이다.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 민족주의자라고 밝힌 바 있는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 케이의 템 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하면서 평생의 동지 올리버 탐보와 함께 청년동맹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간디의 시민불복종운동을 추종해 불매운동, 파업 등 전통적인 투쟁방식에 주력했다.

52년에는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법률사무소의 문을 열고 인종차별법 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흑인저항운동은 60년 3월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다.

통행증 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흑인 69명이 무차별 사살된 "샤프빌 학살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불복종 투쟁이 무장 폭력 투쟁으로 발전했고 흑인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됐다.

 

만델라가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이때이다.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불법화되자 탐보는 국외로 탈출하고

만델라는 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을 결성해 전국적인 파업과 게릴라 활동에 나섰다.

흑인해방을 위해 무기를 든 지 17개월 만인 62년 8월 체포된 그는

64년 6월 리보니아 재판소에서 국가 전복기도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만델라는 처음 12년간 케이프타운 앞 바다로 벤 섬의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채석장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비타협의 원칙을 철저히 적용시켰다. ‘비무장 투쟁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백인정권의 회유를 뿌리치면서 말이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운동 또한 시들지 않았다.

특히 80년대 이후의 투쟁은 만델라 석방운동에 집중되었다.

88년 옥중에서 맞은 고희 때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 세계 지도자들의 축하 메시지를 받은 일은 유명하다.

 

91년 7월 민족회의 의장으로 선출 된 만델라는 실용주의자로 변신했다는 내부 강경파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탁월한 정치술로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342년 만에 남아공의 흑인 피지배 사슬을 풀어냈다.

보복하지 않는 상생의 정치,

흑인과 백인이 어우러져 사는 나라,

화해와 용서와 평화를 일궈냈다.

 

99년 6월, 80회 생일을 맞이하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보궐선거를 통해 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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