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조선시대 양반과 민중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11. 22. 09:57


6. 조선시대 양반과 민중

 

 

6.1. 양반 중심의 사회 

조선은 전국을 크게 8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왕이 임명하는 관리를 파견했다. 조선의 사회 계층은 지배층인 양반, 기술과 행정 사무를 맡는 중인, 피지배층인 평민과 노비로 나뉘어 있었다.

양반은 반반과 무반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관리가 되려면 보통 과거시험을 거쳐야 했다. 고거제도는 고려촞부터 실시된 문무 관료의 선발 시험이었다. 3년에 1회씩 시험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필요에 다라 수시로 실시되었다. 고너는 양반만이 아니라 평민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수의 양반 가문에서 합격자를 다수 배출 하였고 고위직의 관리에게는 자식에게 세습하는 특별대우도 받았다.

양반은 각지에 많은 토지를 갖고 노비를 부리며 백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자로, 대대로 관직을 독점하고 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신분이었다. 반면 평민들은 여러 가지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며, 국방의 의무를 지거나 건설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6.2. 사회의 변화

조선시대 민중은 대부분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일부는 상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지주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다.

17세기 이 후에는 농사짓는 방법이 발달하여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힘입어 상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채소, 인산, 담대 등 상업 작물들이 많이 재배되고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5일이나 7일에 한번 씩 열리는 정기시장인 장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1,000여 곳을 넘었다.

상업이나 교통의 중심지에는 여관이 생겨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상설 상점들이 점점 늘어났다.

18세기에는 서울 인구는 30여 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부 농민과 상인들은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를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다.

돈을 주고 양반의 지위를 살 수도 있게 되어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신분질서에 대한 의식은 약화되었고

신분 못지않게 경제력이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게 되었다.

 

 

6.3. 민중의 개혁 요구 

19세기 에 들어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몇몇 가문에서 권력을 독차지함에 따라 매관매직 등이 성행하고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다.

사회변화를 주도하며 변화를 갈망하던 민중은 이제 더 참고 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공정한 세금징수와 불법 수탈 금지를 요구하며 지방 관청에 항의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자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을 민중봉기라 한다.


1811-1812년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봉기는 한곳에서 일어나면 이웃 고을로 확산되었으니 농민들이 얼마나 개혁을 바라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