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나는 내 생애에서 다시없을 비운에 빠져 있었다.
남편과 이혼을 한데다가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앞날이 암담했다.
나에게는 직업도 없었고 또 취직을 하려 해도 무슨 일이건 그만한 자격을 구비한 것이 없었다.
나는 우선 그동안 살고 있던 디트로이트를 떠나기로 했다. 하루 빨리 떨쳐버려야 할 그 절망의 기억들이 그곳에서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듯 싶어서였다.
나는 시카고로 거처를 옮겼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곳에서 한 여행사에 취직이 되었다.
쓰라린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는 그곳에서도 사회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나는 말이 적은 여자여서 그런지 언제나 침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과 사귀는 일이 힘들어 관계를 끊기로 했다.
나의 불행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친절을 베풀거나 다정하게 대해도 차갑게 거절 하며 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자기 연민에 빠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삶이 싫어,
나는 무엇이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이건 잡지건 심지어 신문광고까지 굶주린 사람처럼 마구 읽어치웠다.
그때 신문에서 나의 시선을 잡이 끄는 것이 있었는데 매월 10달러씩 식료품과 의복 그리고 학용품을 대주는 결연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봉투에 10달러를 넣어 광고에 적힌 주소로 우송했다.
정직하게 고백한다면 그때 자선을 지속적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0달러라는 액수는 나의 한 달 수입에 많은 액수에 해당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불행하게 살아갈 때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이나 우울한 생활과는 깊은 관련을 맺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를 돌보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그럴만한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연기관이 선택해준 독일 소녀로 인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헬가는 10세의 소녀였다.
그 아이는 독일 함부르크 근처의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살 때 트럭운전사였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신경쇠약으로 공공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고 했다.
다만 이웃의 할머니가 이 아이를 맡아 기르며 정부기관에서 주는 생계비로 겨우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연기관을 통해 헬가의 사진을 보았다.
비참할 정도로 야윈 얼굴, 발육부족의 앙상한 체구에 비해 가엾게도 나이는 훨씬 많이 들어보였다. 창백하고 쇠약해 보이는 얼굴 표정은 사진이지만 겁에 질려 있었고 크고 검은 눈은 애처로울 정도로 기가 죽어있었다.
헬가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가 당하고 있는 곤경이 정말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가진 돈을 털어 헬가와 그 보호자를 위한 음식과 의복을 사는데 모두 썼다.
나는 곧 바로 그 물건들을 항공편으로 헬가에게 보냈다.
몇 주일 후 헬가가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결연기관에서 영어로 번역해 보내주었다.
소녀는 ‘낯모르는 아줌마’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지나간 과거를 잊기 위해서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추억이 담긴 사진들은 모두 불태워 버렸었다.
소녀의 청을 들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내기로 했다.
오랜 만에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칙칙한 빛깔의 사무복, 손질하지 않은 머리, 화장기 없는 딱딱한 얼굴 …,
이 꼴 그대로의 모습을 헬가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을 찾아 머리손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화장대 앞에 앉아 정성스레 얼굴을 가꾸었다.
사진 촬영 때는 카메라 앞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까지 지었다.
이 밖에도 내가 달라진 모습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보낸 새 옷을 입고 찍어 보낸 헬가의 사진을 받았을 땐 이 기쁨을 도저히 감춰두고만 있을 수 없어 직장동료들에게 자랑했다. 동료들은 따뜻하게 웃으며 나를 축복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동료들은 차츰차츰 자기들 사이에 나를 끼워주기 시작했다.
헬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하여 근무가 끝나는 대로 독일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독일어학원에는 간혹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책을 구입해 읽기도 하는 사이에 독일에 대한 전문가가 다 되었다.
얼마 후 똑 같은 일만 하는 직책에서 승진하여 카운터에서 고객을 상대하게 되었다. 급료도 10달러가 올랐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결연기관을 통해서 또 다른 아이 한 명을 더 맡기로 했다.
6세가 된 요엘이라는 프랑스 어린이를 택했다.
요엘의 아버지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하루 10시간씩 마루의 바닥을 닦는 청소 일을 해 겨우 먹고사는 딱한 처지였다.
나는 식료품과 의복 그리고 이번에는 헬가가 그리도 좋아했던 것을 상기하며 장난감도 보냈다.
요엘의 어머니가 보낸 재미난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요엘이 어떤 아이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은 야위었지만 웃고 있는 갈색 눈은 명랑한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요엘은 미국 아줌마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물으며 친구들에게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나는 어느 정도 프랑스어를 읽고 쓰게 되었다.
흥미가 흥미를 자극하여 어느새 유럽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서도 상당한 식견을 갖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유럽에 대해 상당한 전문적 지식을 인정해 유럽부 책임자로 승진시켰고
급료는 처음 받았던 것의 두 배를 받게 되었다.
나는 또 다시, 결연기관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마르코와 빈센조라는 두 소년과 에프로시니라는 그리스 소녀를 돌보기로 했다.
마르코는 여섯 살 난 소년으로 목각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 명랑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목각인형을 깎아 나에게 보내주었다.
광주리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고 세탁소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말라리아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빈센조는 나이가 여덟 살이었지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소년이었다. 나폴리에 있는 작은 방 네 칸이 딸린 아파트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이 외에 다른 네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가끔 굶기도 하거나 여러 날 스파게티와 묵은 빵으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에프로시니는 아홉 살 난 소녀인데, 그 가족의 슬픈 수난의 역정은 그 아이의 유난히 크고 검은 눈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두 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고,
어머니는 그리스 해안에서 떨어진 이오니아 섬의 볼모지에서 농사를 지어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비참한 가난에 대해 많은 미국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주위에서 “왜, 외국 어린이들을 돌보느냐?”고
질문을 받게 되는데
나는 그들에게 “굶주리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관한 한 국경이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하곤 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생활의 고달픔과 즐거움을 나에게 전해주어
서로 베풀며 나누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는가.
사랑을 주고 또한 받지 않았는가.
그래서그 어린이들 때문에 나는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고,
사회생활에 복귀하여 성공하지 않았는가.
언젠가 헬가가 유행성 감기에 걸린 일이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의사와 상담하고 약을 조제하여 보냈다.
소녀는 내가 걱정하는 것을 알고
편지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이 내 사랑하는 코니 아줌마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실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결연한 아이들을 하나하나 만나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헬가를 찾아갔는데
그 아이는 너무 흥분하여 함부르크 비행장 세관 칸막이 밑으로 빠져나와 나에게 달려오면서
‘코니 아줌마, 저는 보자마자 알았어요! 사진과 똑 같은 걸요!”
소녀는 만남에 감격하여 학교성적표를 꺼내들고는 짧은 영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독일말로 소리쳤다.
성적은 매우 좋았다
나에게 무엇인가 보답하려는 욕망은 다른 어린이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엘은 자기 손으로 만든 미국국기를,
마르코는 자신이 만든 목각 캐딜락자동차의 모형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내게 내밀었고,
작은 에프로시니는 자기 어머니의 볼모의 경작지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과일나무에서 아몬드가 든 조그마한 광주리를 나에게 주었고,
소아마비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빈센조는 어떻게 꺾은 것인지 모르는 한 다발의 들꽃을 내밀었다. 더욱 놀란 것은, 이 아이의 마을 사람 전부가 나를 맞이하려고 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좁은 길 위에 “코니 아줌마 만세”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어느 날, 나와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여러 신문에서 앞 다투어 기사화했다.
시민들이 마련해준 한 만찬에서 안토니오 푸시토라는 풍채 좋고 매력적인
호텔 지배인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소개될 때 그는 존경의 마음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겸허한 동작으로 내 손등에 키스를 하였다.
안토니오 푸시토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한 평생을 서로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가까워졌다.
그는 자기 차를 나에게 내주어 마르코와 빈센조를 방문할 수 있도록 했고, 아이들에게 주려고 마련해 온 선물에 자기의 선물까지 준비해주었다. 마르코가 공예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로 나의 어린 가족들의 편지 속에는 온통 안토니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자기의 가족에게도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꼭 있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런지 즐거웠다.
‘인생의 행복감이란 이렇게 기쁜 거구나!’ 참으로 뿌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로부터 한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코니, 이탈리아로 와서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요?”
그는 소년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해 왔고
나는 그의 청혼을 승낙했다.
아름다운 소렌토,
그곳에서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나의 어린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신혼여행을 즐겼다.
[15 Aug.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