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선임되었다. 당시 소련은 ‘지칠 대로 지쳐있는’ 사회주의 대국이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중앙통제계획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성장의 둔화, 생산기술의 퇴보, 서방과의 생활수준 격차를 겪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당의 관료주의, 무기력과 부패,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알코올 중독, 실업, 매춘 등 자본주의의 고유의 병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내걸고 페레스트로이가(Perestrojka)와 대외 개방정책인 그라스노스트(Glasnost)를 정책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 정책은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재편성, 사회 경제적인 발전의 지향자율적인 정치권력과 서구적 민주주의 도입, 언론의 자유를 내용으로 하였다. 또한 외교정책이 기조를 대외 정책 수단에서 군사력을 배제하는 탈(脫) 군사화, 모든 국가와 평등관계를 유지하는 동등화, 국제 관계에서 이데올로기를 배제 하는 탈 이데올로기화에 두었다.
그 결과 정통적인 동서간의 긴장이 완화되었고 또한 당시에 사회주의 국가를 제약하고 있던 ‘제한 주권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제한 주권론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변화 노력을 소련이 저지할 때 당시 소련 서기장인 브레즈네프가 내세운 독트린이다. 사회주의 기초가 위험하게 되거나, 또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적이니 공동체 이익을 해칠 위험이 있으면, 다른 사회주의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국가 정부를 원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동유럽을 묶어주고 있던 구심력이었던 사회주의적 대의와 동맹이 무너지자, 동유럽에 대변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회주의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변혁’이었다. 1989년 10월 20일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 7개국 외부장관 하의에서 외세에 의한 주권 불간섭 원칙,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 현 유럽 국경선의 인정을 선언했다. 이로 말미암아 소련이 공식적인 동유럽 외교의 기본정책으로 채택하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사라졌다.
결국 기존의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은 대부분이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저항, 재야 시민단체와 원탁회의, 자유선거, 연립정권의 수립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붕괴되었다. 1989년 가을이 되면서 동유럽에서 공산당의 권력 독점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폴란드에서는 8월 29일 자유노조의 마조비에츠키의 수상 취임, 헝가리에서는 10월 18일 노동자 계급의 독재와 당의 지도적 위치를 헌법에서 삭제하고, 나라의 이름을 헝가리공화국으로 고쳤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2월 29일 시민 포름의대표이었던 하벨이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불가리아는 12월 13일 공산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헌법에서 삭제하는 등의 8개 개혁안을 발표 하였다.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루마니아로, 내전 상태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후에 차우체스크 부부가 체포되어 12월 25일 처형되는 유혈 사태를 겪었다.
이렇게 동유럽엣 대변혁이 일어나는 시기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8월 7일 헝가리로 여름휴가를 와 있던 약 200여명의 동독 젊은이들이 헝가리 주재 서독대사관에 들어가 서독으로 송환을 요구했고, 이는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다른 대사관으로 이어졌다. 이 결과 매일 거의 2천~ 3천 명씩 서독으로 이주를 하여 약 7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동독 내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우위성’이라고 하는 그 동안 당과 정권의 선전과 통치 이데올로기, 정통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전국적으로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동독 내의 라이프찌히 시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83년 가을 라이프찌히 광장에는 50여명의 청년들이 동‧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의사표시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고, 경찰이 체포하려고 달려오자 니콜라이교회 예배당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시작된 평화의 촛불기도회는 그 후 니콜라이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6시에 기도회와 집회로 계속되었다. 이 기도회에서는 예배와 함께 자연 발생적으로 성명서와 정보들이 교환되었고, 노래와 선언문 등이 작성되었다. 또한 촛불을 손에 들고 서로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격려했다.
1989년 여름까지는 100여명 정도가 모이는 소규모 집회이었으나, 가을에 젊은이들이 동유럽을 통하여 탈출하는 사건이 진행되면서 참석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곳에서 목사, 재야민주운동가 들이 모여 ‘새로운 광장’(Neues Forum)이라는 운동단체를 조작하였다. 10월 2일에는 2만명, 9일에는 7만 명, 16일에는 20만 명, 23일에는 36만 명, 30일에는 57만 명이 시위를 위하여 모였다. 라이프찌히 인구는 당시 55만 명이었다.
이 반정부 시위는 드레스덴을 포함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100만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위한 자유 언론,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이 모든 과정이 비폭력과 무혈로 이루어졌다.
결국 이러한 변혁 요구로 말미암아 10월 18일 18년간의 동독을 지배했던 호네커가 물러났고,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DDR)도 권력을 상실하고, 구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길로 접어들었다.
동독 정권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일지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89년
10월 10일 호네커 18년 만에 실각, 에곤 크렌츠가 후계자가 됨.
11월 08일 내각 총사퇴, 개혁파 한스 모르도프가 수상이 됨.
11월 09일 베를린 장벽 개방.
11월 28일 서독 콜 수상 독일통일 3단계 10개항 발표.
12월 01일 동독 현법에서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지도적 역할 삭제.
12월 04일 호네커 당에서 축출.
12월 06일 에곤 크렌츠 국가 평의회 의장 사임.
12월 07일 동독 당간부와 재야 세력이 첫 원탁회의 가짐.
12월 08일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임시전당대회 개최하여 그레고를 기자가
새로운 정당인 PDS(독일민주사회당)의 의장이 됨.
12월 16일 동독 기독민주당(CDU)이 이전의 SED의 협력당으로써 과거를 청산하고,
로타르 드메지에르가 새로운 의장이 됨.
1990년
02년 05일 8개 야당이 참여하는 거국 내각이 들어섬.
02월 10일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에서 서독 콜 수상과의 회담에서
독일 통일을 인정 함.
03월 18일 동독인민의회 선거 실시, 보수파 압승
기민당(SDU), 독일사회연합(DSU), 민주개혁(DA) 48%,
사민당(SPD) 22%, 민주사회당(PDS) 16%, 자유당(FDP) 5%.
05월 05일 본에서 제1차 2+4(동‧서독+미,소,영,프) 회담 열림.
07월 01일 동서독(통일 준비)의 통화, 사회, 경제 통합 협정 발효.
08월 23일 동독 인민의회 10월 3일 서독에로의 통합 결정.
0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제4차 2+4 회담,
독일 통일 문제 최종 해결조약 조인으로
독일에서의 전승연합국 권리가 끝남.
10월 03일 독일 통일이 공식적으로 선포 됨.
10월 14일 구 동독지역에서 주의회 선거.
12월 02일 독일 전체 주에서 연방의회 선거를 16개 주에서 실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냉전질서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 되자, 동서독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독일은 새로운 국가 형성을 위한 이념과 지향하는 질서가 요청되었다. 그것이 동독 국민이 원했던 자유이든(Wir sind das Volk!/우리는 민중이다.), 서독 국민들의 독일 민족주의든(Wir sind ein Volk/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그들은 '통일'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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