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 (1597년 10월 25일)

행복나무 Glücksbaum 2023. 12. 8. 21:45

이순신 장군은 기댈 곳이라곤 백성들 뿐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군량미도 전쟁 물자도 보내주지 못했다. 꾸역꾸역 백성들이 이순신을 따랐고 군사의 양식은 백성들이 조달해줬다. 이 때 모함이 날뛰었다. 임금 선조와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다.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지전쟁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1597년 4월 11일 수군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형을 면하고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597년 8월 28일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통영 한산섬 ‘수루(戍樓)’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바꾼 현판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閑山島明月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1597년 10월 25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 왜군들은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했다. 또 모해와 음해가 뒤 따랐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정녕 내가 죽어야 나라를 구한단 말인가’  
1598년 음력 11월 18일 조선 수군 70여 척,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조선-왜(일본) 7년전쟁은 끝난다.


[25. Oktober 2022]



*2022년 대선이후 역사를 숨기려는 견돈 윤석열이란 매국 좀비가 득세하여 망세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