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야만의 시대를 돌파한 예술의 정신 [화백, 윤이상]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2. 25. 08:06


Foto/  ‘윤이상 기념관’, 통영

1967년에 '동백림사건'이라고 있었다. '동백림'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한국의 박정희 군사 반란 정권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조작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 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던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이 있었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독일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단절 시비를 낳는 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윤이상은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독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1971년 독일 정부의 권고로 독일에 귀화한 윤이상은 1972년 오페라 ‘심청’으로 뮌헨 올림픽 개막 공연을 수행했다. 1974년 독일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77년부터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재직했다. 1984년 ‘교향곡 1번’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초연되었고, 1985년 튀빙겐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받았고 1995년 괴테 메달을 받았다. 그해 11월 3일 베를린에서 영면하기까지 윤이상은 78년의 생애에서 반세기 이상 조국의 민주화와 남북의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현대음악 작곡과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내 고향 땅 ‘통영’에 묻히고 싶다.
“나는 통영에서 태어나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인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서 나의 평생 작품을 작곡해 왔다. 내가 유럽에 체재해도 나는 내 고향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 잔잔한 바다, 푸른 물색, 파도 소리는 나에게 음악이었고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나에게는 음악이었다.” (윤이상의 육성 편지 중에서)

윤이상은 끝내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 사회 끈질긴 ‘빨갱이 산업’은 한 예술가를 옥죄었다. 그러나 세계에 이름을 떨친 그의 예술적 성과는 남북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대통령 시기(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조국은 그를 기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영 시내 윤이상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과 통영국제음악당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통영국제음악제로 윤이상은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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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기념관을 찾아가자 입구에서 친절한 분이 안내를 해주셨다. 통영국제음악재단TIMF 이중도 팀장이었다. 10년 동안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일하면서 통영을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로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한 공무원이다.

14년 전 나는 베를린에 1년 동안 체재할 때인 2009년 8월 베를린에 있는 ‘독일 윤이상협회’의 대표인 슈파러(Walter Wolfgang Sparrer)씨를 만났다. 그와 나눈 대담을 링크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59146

Foto사진/ 통영 시내 ‘윤이상 기념관’ /
독일 윤이상협회 회장 슈퍼러씨(오른쪽)와 대담하는 필자 김상수


[Am 08. Dezember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