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사가미만(相模湾)을 진원으로 하는 매그니튜드 7.9의 대지진이 일어나, 남쪽 관동을 중심으로 한 넓은 범위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사망자・행방불명자가 약 10만 5,000명으로, 기록에 있는 일본의 지진 피해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지진 발생이 낮과 겹친 것도 있어 화재가 발생해 대화재가 되었다. 화재는 3일간 계속되어 당시의 동경시의 가옥의 60%가 소실하였다.
이 대지진 직후에 군부, 경찰, 그리고 민중에 의해 조선인・중국인에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에 이르는 경위는 이렇다. 지진 재해 당일인 9월 1일에는 일찍이 조선인에 의한 방화와 폭동의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강도단이 되어 각지를 파괴하고 여성에게 폭행을 일삼고 있다”고 근거 없는 소문이 퍼졌다. 정부는 이 유언비어에 근거해 적으로서 습격해 오는 조선인으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2일 오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일 아침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이름으로 해군 후나바시(船橋) 송신소로부터 전국의 지방 장관에게 조선인에 대한 경계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不逞鮮人(후테이센징/불량조선인) 불순한 목적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것을 엄밀히 단속하라”는 전령이었다. 이를 받은 동경 및 주변의 각 지역에서는 속속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재해지의 치안유지와 상황의 장악을 위해 출동한 군대를 본 민중은 조선인에 의한 폭동을 현실로 생각해 갔다.
처음에 학살을 자행한 것은 군대였다고 했다. 손을 철사로 묶인 수십 명의 조선(현 한국)인들이 강변으로 끌려와 뒤에서 총으로 쏘는 것을 많은 주민들이 목격했다. 시체는 그대로 강으로 흘러버렸다. 또한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총으로 쏘고, 총검으로 살상해, 시신에 등유를 뿌리고 태워 구덩이에 묻었다.
재향군인회도 학살에 가담했다. 이들 중에는 식민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3 ・1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은 잡은 조선인을 자경단에 넘기기 시작했다. 민중은 대나무 창을 만들고, 농기구와 칼을 준비했다. 또한 창이나 일본도로 무장하는 이들이 검문소를 만들어 한국조선인을 찾아내 살해하기 시작했다. 학살에 참가한 민중 중에는 ‘일본도를 시험삼아 베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중은 조선인-한국인을 찾아 죽이려 경찰에 잡혀 둘러 싸여 있는 한국(조선)인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는 예도 있었다. 조선인을 잡고 살해함으로써 나라에서 포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민중에 의한 대량학살은 군대나 경찰이 무장을 해제된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갔다. 많은 중국인도 이 학살에 휘말려 죽었다.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6,000명이 넘었다. 이것이 100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100년전의 일이다. 관동 지진은 책, ‘파친코’ 에서도 읽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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