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조정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청신을 막아야 합니다."
아들 형제가 의논하는 말을 그 어머니가 들었다.
"그 사람은 어떤 일이 있기에 그러느냐?"
"과부댁 가정으로 소문이 좋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남의 집, 규방의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들리는 소문입니다."
"들리는 소문?,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고,
코로 맡아지지도 않으면서 퍼지고 퍼지는 풍문,
풍문을 듣고 남을 평해?,
더구나 너희들은 과부의 자식이 아니더냐?
과부의 자식으로 과부를 탓해?
게 있거라,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품속에 싸두었던 물건 하나를 꺼낸다.
한 겹 두 겹, 소중하게 싼 것을 풀더니,
동전 한 잎을 꺼냈다.
"이 동전에 글자가 있나 봐라."
"다 달아서 없습니다."
"테두리가 있느냐?"
"달아서 없습니다."
"내 손에서 다 달아 없어졌다. 이것이 네 어미의 '인사부'(忍死符)이다." 하며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사람이란 血氣가 있으면 정욕이 있게 마련,
외롭고 슬프면 정욕은 더한 것,
과부도 사람인 이상 정욕이 없으랴.
과부는 외롭고 슬픈 사람,
타들어 가는 등잔 밑에서 홀로 새벽을 기다리는 슬픔,
처마 끝에 낙숫물 듣는 소리, 창에 비치는 달빛, 뜰에 낙엽 지는 밤,
외기러기 울고 갈 때,
철 모르는 옆방 코 고는 소리,
첫닭은 아직도 울랑 멀고,
이 때면 나는 지향할 길이 없어 이 동전을 굴리면서 혼자 밤을 새웠던 것이다.
둥근 것이 돌다가 쓰러지면 또 굴리고,
또 쓰러지면 또 굴리고,
하면 하루 밤은 밝는다.
한 10년이 지나더니,
밤새에 한번,
열흘에 한번,
또 몇 해 지내더니, 반을 줄어,
또 5년 후에는 혹 생각나면 반년에 한번,
이제 와서는 내 혈기도 다 쇠했다.
다시는 이 돈을 굴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겹겹이 싸서 소중히 간직한 것은,
옛 功을 잊지 못해서요, 스스로 나를 경계함이다."
드디어 어미와 두 아들은 서로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다.
글, 燕岩 박지원의 글에서
[24. Juni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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