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그 생김새처럼 전혀 진보적인 인물은 아니었단다. 그의 개혁을 보수적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가톨릭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르네상스는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은 굉장했으나, 실제론 몇몇 지식인과 예술가 집단에 한정된 것이었어. 그러나, 종교개혁은 보수적인 행동으로 시작되기는 했어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단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사원, 즉 지금의 바티칸 교황청이자 세기적인 관광명소지. 이 사원을 건축하기 위해 푸거 가에 엄청난 돈을 빌렸지. 스페인 카를로스5세도 신성로마제국황제 입후보를 위해 역시 푸거 가로부터 돈을 빌렸으나 돈은 곧 떨어져 버렸고 공사는 중지해야만 했던 거야. 빚도 갚아야 했지.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면죄부 판매였단다. 건축 기부금을 내면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하늘에 기록된 죄가 모두 지워진다고 일종의 사기를 친 거지. 특히 면죄부는 독일에 집중적으로 팔렸는데, 이때 사정은 성직자가 너무 많이 배출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 교회나 수도원에서나 일할 자리가 없었던 것 외에도 이를 제어할 중앙권력이 없었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지.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가던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팔지 못했다. 상업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목회 신학이 교회 안의 신앙을 지탱해 주었거든.
요새 우리나라도 과도한 성직자 배출로 일터가 없는 적체현상이 일어나다 보니까 목회도 백화점 이벤트 행사처럼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시킨다’는 왜곡된 논리가 성행하고 목회자들이 성공주의로 신학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물신주의, 무속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단다. 건전한 신학이 외면당하고 목회윤리가 땅에 떨어져 뒹구는 교회 타락의 현상이지.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란다. 예배당은 있는데 복음이 행방불명됐고, 교회가 있는데 예수가 행방불명 당한 이치지.
1517년, Martin Luther가 Witenburg교회에 '95개조 반박문' 을 붙이면서 독일의 교히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단다. 루터는 인간은 내면적인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세초기의 순수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의 행위는 훗날의 역사가가 표현한대로 "바짝 마른 짚단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158년에 루터는 소환되었고, 1519년에는 ‘엑크’라는 신학자와 토론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로마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단다. 그렇지만 이 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순수한 기독교'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로마교회와 결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지.
레오 10세는 1521년에 드디어 루터를 파문하게 된단다. 그러나, 작센 공인 Friedrich the wise가 마르틴 루터를 숨겨준거야. 우리가 가본 아이젠나흐라는 요새였지. 봐르트부억이라던가. 루터는 이때 성서의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했지. 이 번역은 역사상 최초의 모국어성서로서 독일어의 문법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단다. 독일대중은 성서와 문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어.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영문법에 큰 공헌을 한 것처럼 말이야. 또는 흥정역 성서가 영어의 문체를 수려하게 했던 것처럼.
근대적 자본주의 이행에 나타나는 사상의 단초는 이때부터 형성된단다. 루터의 사상은 신앙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 집약되며, "성서는 모든 대중이 읽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지. 일반대중이 성직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근대적 개인주의사상이 자라기 시작했단다.
이 무렵부터 독일에는 3가지 집단이 등장하게 되지. 새로이 등장하는 중소 상공업자를 대변하는 집단과 교황권의 약화로 수많은 수도원의 토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다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대제후들 (루터를 보호한 작센 공도 이런 경우다) 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야.
① 보수적인 가톨릭세력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 - 성직 및 제후들, 고급성직자, 도시의 도시귀족들, 부유한 상층귀족들.
② 도시 시민적 개혁집단(protestant) 서서히 상공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시민들. 하층 귀족들, 신성로마제국으로 독립과 수도원재산에 관심 있는 제후들 등이다. 앞서 언급한 작센 공도 이 경우이다. 1522년에는 루터에 자극 받은 이들 기사단이 슈말칼덴 동맹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화약무기와 총포류의 발달로 기사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가던 때라 발악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③ 혁명적 집단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농노, 농민들, 일일노동자, 룸펜프롤레타리아,journeymen(길드에서 마스터가 되지 못한 자들) 등, 1524-1525년의 농민전쟁을 주도한 그룹이다. 이들은 민중을 설득하는 토마스 뮨쩌의 사상에 더 감염된 집단이다. 루터의 개혁이 정통/귀족적 개혁 이라면, 토마스 뮨쩌 중심의 농민반란은 민중적/과격/급진적 교회와 신앙개혁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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