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프로이센의 등장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1. 10. 19:19

저기압이 계속되어 그런지, 심한 기침을 한다며? 빨리 감기가 나았으면 하는구나. 며칠 전, 노르웨이의 라면 왕이라는 이철호 씨의 인터뷰를 T.V를 통해서 보았단다. 54년경 어린 나이에 노르웨이의 종군의사를 쫓아가서 많은 역경을 겪으며 라면을 팔아 억대 부자가 되었다는 인생역경을 잔잔한 웃음으로 소개하더구나. 짧은 감동의 시간이었단다.

언제나 보면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노력한 만큼 위대해 질 수 있단다. 정우, 정현이 각기 멀리 떨어져 생활하고 있지만 큰 비전을 키워가기 바란다.

 

 

그럼, 다시 독일역사의 요점을 살펴보는 것 계속해 볼까!!.

 

얘들아, 18세기 초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왕가의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 숱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의 결과는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확장이었단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중앙관료체제가 성립되었고,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졌지.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문화도 이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단다.

 

17세기에 선제후 Friedrich Wilhelm I세를 중심으로 Hohenzollen家가 Brandenburg-Mark를 중심으로 서서히 발달한다. 이 나라가 바로 훗날 군국주의의 대명사로 19세기 독일 역사를 주도해나간 프로이센 왕국이란다. 1618년에 독일기사단이 개척한 땅인 프로이센을 Hohenzollen家가 상속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되었지. 왕국의 호칭을 획득한 것은 1701년의 일이다. 1653년에 상비군설치의 대가로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1640~1688)는 융커들에게 무관세정책을 취했고, 동프로이센의 대지주인 융커(Junker)들은 곡물무역을 독점하면서 상업 도시민층의 성장을 방해해 나갔어. 이것은 자본주의 발달에 장애를 가져왔지. 융커들은 정치권력마저 장악하면서 19세기 중반까지 부르죠와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단다.

 

선제후 Friedrich Wilhelm은 30년 전쟁의 피해복구에 주력하면서 절대왕정체제를 수립하여 프로이센 부흥기의 기반을 닦았단다.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Friedrich Wilhelm I(1713~1740)와 그의 아들 Friedrich II(1740~1786)때 일이었지.

 

앞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센은 1701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동의를 받아 선제후에서 프로이센 왕으로 승격하는데 첫 국왕이 Friedrich I세란 사람이야. 점점  독일은 프로이센(Hohenzollen)과 오스트리아(Habsburg)로 이원화되어갔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공세적으로 되어간다. 국제무대에서 위치를 강화하고자 절치부심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강대국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개입하였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에 개입하면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이 끝난 후, 중상주의정책 등으로 국가부흥에 힘썼어, 행정말단까지 군주 1인이 지배하는 군국주의적 관료제적 절대왕정을 수립하였단다. 그는 오직 토지귀족층인 Junker를 국가의 근간이라고 생각하고 농노(Leibeigene)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반면, 중산층에 대하여는 이해보다는 경멸하였지. 군국주의적 절대왕정 체제하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메뉴팩츄어는 주로 국가가 소유한다는 주장이었어.

 

이 메뉴팩츄어들은 서서히 사적 자본으로 넘어갔으나 프로이센의 자본주의는 아직 봉건적인 유제들에 묶여있었지.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의 국가이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국가의 우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단다. 1770년대 말부터 부르죠와와 귀족사이에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군국주의 전통아래 국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사조의 책 생산이 증가하면서 부르죠와 독서층이 형성되었던 거야.

 

이제 이른바 새로운 "질풍노도의 시대(Sturm und Drang)" 가 몰아닥쳤고, 본질적으로 부르죠와적 자유를 원하는 계몽작품들이 등장하였단다. 이 시기에 Kant, Herder 등이 대 활약을 하지. 1737년엔 괴팅겐 대학이 설립되었는데, 이 대학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대학이 괴팅엔 대학이라 할 수 있지. 이 시기 역사학 연구는 전통적 보수주의 역사에서 벗어나 보조과학을 이용하면서 광범한 역사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단다.

 

독일과 관계해서 떼어놓을 수 없는 나라가 오스트리아야. 7년 전쟁이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상실하였으나, 여전히 중부유럽의 강대국으로 남아있었어. 영토는 광대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여서 한 국가로서 견고한 통일성이 없었단다. 오스트리아의 개혁을 시도한 군주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Josep II세란 사람이었어. 178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면서 요세프 2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개혁을 추구하였어. 농노해방, 사형과 고문의 폐지, 교육의 보급 등 많은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개혁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하고, 전 인구의 1/4에 불과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은 타민족들의 반항에 봉착하여 그만 실패하였단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을 작성하였지.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세 2세가 잠들다."라고 말이야. 오늘날 그를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라고 부르는데는 이런 이유에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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