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농민전쟁과 토마스 뮨처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1. 16. 20:53


농민전쟁은  1524년-1525년까지 진행되었은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익과 좌익, 그리고 중도적 해석이다. 우익은 정치적 해석이 주가 되는 것으로 농민봉기의 원인을 연방군주권력과 농민공동체권력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찾고 있다. 농민은 관습법(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에 연연하는 데 비해, 영주계급은 로마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농민들이 법적 관계를 둘러싸고 영주계급과 충돌을 빚은 것이 1525년 농민봉기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좌익적 해석은 Marxism적 해석이다. 그들은 1525년 독일농민전쟁을 초기 부르죠와 혁명으로 파악한다. 당시 독일은 아직 부르죠와 혁명이 수행될만한 생산력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부르죠와가 아직 미성숙하므로 농민층의 힘을 빌어 부르죠와 혁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종교개혁이 부르죠와 혁명의 첫 번째 시작이고 그 와중에 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근데 뒤에 살펴보면 알겠지만, 독일의 부르죠와는 다른 나라의 부르죠와보다 그 힘이 약했다. 차차 살펴보게 될 것이다).

 
중도적 해석가들은 사회사가들이다. 농민전쟁을 부농이 지도했다고 본다. 자신들이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자 봉기했다는 것이다. 농민봉기가 도시시민과 봉기와 관련지어 일어났다. 이 계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14세기이후 농민봉기의 성격은 그 이전과 비교해 성격이 달라졌다. 14세기이전의 농민반란은 장원내의 영주폭정에 저항하는 것이 주요한 성격이었다. 세금감면, 부역감면 등을 주장하면서 장원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300년 이후 농민반란은 두 가지 면에서 달라졌다. 우선 규모 면에서 넓은 지역에서 여러 장원 내 농노들의 연락으로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이는 자급자족 경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에 상품유통이 영주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성격도 변했다. 이전엔 자발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정도였으나, 이때에는 지도자중에 상공업자와 수공업자가 많았으며, 빈농보다 중농/부농이 더 많았다. 지도자의 성격도 농촌 부르죠와나 도시 부르죠와가 선구자적 역할을 많았다. 좌파 학자들은 발전중인 부르죠와가 농민들과 힘을 합하여 일으킨 난으로 농민반란을 평가하기도 한다. 와트타일러의 난 때, 농민군은 여러 봉건적 속박의 철폐와 함께 "상품매매의 자유" 를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 슈바아쯔 발트(흑삼림 지대)에서 시작된 봉기는 곧 독일의 서남부로 번져갔고, 독일의 1/3이상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뮨스터를 점령하고 농민왕국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12개조 요구를 제시하였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농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목사(사제) 선출권을 갖도록 해달라", "십일조를 폐지하라(교회의 농민에 대한 압박과 착취거부)", "인신예속을 폐지하라", "수렵, 어로, 사냥권과 산림채취는 공동권으로 영주가 세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부역과 지대를 감면하라, 귀역, 영주의 사냥을 금지하라", 등등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바로 영주와 교회였다. 농민군은 곳곳의 교회와 수도원을 습격하여 파괴했다. 그러나, 적절한 지도자의 부재와 지역에 따라 온건파의 과격파의 이해관계 대립심화로 공동전선을 펼치지는 못했다. 보수카톨릭과 신교파 제후들이 제후연맹을 구성하여 농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섰고, 뮨스터의 농민왕국은 곧 무너져버렸다. 이후 오히려 독일에서 농노제는 강화되었으며, 재판농노제가 19세기까지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농민공동자치를 통한 근대적 영역국민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 농민은 원래 가지고 있던 구권리(영국에서는 "생득권")를 보유할 권리를 가진다. 구례의 관습법 무시. "구권리는 영방제후와 교황에 의해 침해당하므로 구권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어섰다." 라고 주장 → 독일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침

 
< 결과 > 루터의 개혁은 이로써 중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농민전쟁 발발시점을 계기로 농민과 Luther와의 관계는 벌어졌으며, 루터는 정치화한다. 영방교회제 확립을 위해 루터를 지배층이 끌어들였고,(자신들의 지위를 확립코자 했음) Luther는 지배층에 결합한다. 점점 Lutherism은 스콜라 학문화함. 1529년 가을엔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와 결별했던 Luther는 Zwingli파와도 결별한다. 점점 Lutherism은 한정된 교의 지역 안에서 도그마(dogman)가 된다. Luther개혁의 보수성은 멜랑히톤이 "카톨릭적 바탕에....." 라고 언급한데서 그들의 보수성을 잘 알 수 있다. Luther는 슈말칼덴 전쟁 직전인 154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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