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서거하면서 호엔쉬타우펜 가문은 종말을 고했고, 룩셈부르크왕가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제후였던 합스부르크가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태리문제(호엔쉬타우펜)와 국내문제에 매달려 제대로 왕 역할을 하지 못했고, 수십 년 동안 황제가 없는 촌극(대공위 시대)을 연출하기도 했다.
황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영방제후들의 준동이 큰 역할을 담당했고, 또, 그럴수록 황제권은 약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정치생활의 중심이 제후들의 영방국가로 이동한 것이다. 농민반란 실패 후 융커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권력은 더욱 약해졌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독일에 침공할 때에도 독일은 1천여 개의 영방국가로 난립한 상태였으니, 그나마 이것도 많이 줄어든 것이다. 17세기에는 2000여 개였다. 대공위시대이래 독일에서는 영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중앙권력이 존재하는 2원화 된 형태로 6세기 가까이 유지된다. 농민반란은 부르죠와나 농민에게 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긍정적 결과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독일 내에서 세력을 잃었다는 것뿐이다. 적어도 이중의 고통에서 한 짐은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익을 얻은 것은 독립성을 쟁취한 귀족들뿐이다.
30년 전쟁
30년 전쟁은 독일 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이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된 것이다. 크게 두 세력이 있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스부르크 왕조 및 가톨릭 연합세력, 그리고 초기 부르죠와와 다른 귀족들간의 연합세력이다. 나중에 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독일 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는 두 국가가 나오지만, 이때는 아직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국에 불과한 처지였다. 프로이센은 이땐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이다. 전쟁의 시작은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단계에서는 보헤미아와 Platz간에, 제2단계에서는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개입, 제3단계에서는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 제4단계에서는 스웨덴군을 도와 프랑스군(가톨릭인데!)이 개입한다.
이 전쟁으로 독일전체는 피폐화, 황폐화되었고, 인구의 1/3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등에서 일시적으로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나나 실패하기도 했다. 1648년에 맺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왕국이 될 수 있었다.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 제국의회에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이 두 강국(당시엔 스웨덴은 군사강국이었음)이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종교전쟁의 결과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해외 진출하여 한창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의 자기의 반박 논제를 발표함과 아울러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시간이 감에 따라 독일 각 지역에서 논쟁이 벌어지면서 종교, 경제, 정치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스페인에서 자라난 합스부르크가의 카알 5세는 영주들에게 통고만 하고 독일지배자로 등장했다. 이 같은 이유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그들은 지방 분권적인 통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 운동에 가담했다.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 칼 5세는 서쪽에 프랑스, 동쪽에는 터키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새로운 타협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종교개혁운동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었다. 결국 보헤미아 지방에서 시작된 신교 귀족들의 봉기는 내란으로 번져 그 후 독일은 30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체 외국 군대이 완전한 노리개 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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