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30년 전쟁으로 독일 인구는 5백 만 명의 희생자를 낸 후 베스트팔리아 화평이 맺어지게 되었다. 이 때 맺어진 화평으로 독일 제국은 여러 군주국가들의 동맹체가 되었고, 이들 군주국가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은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제국의회(Regensburg에 소재를 둠) 통해서 조정되도록 했다. 처음 이 제국의회의 최고 관심사는 종교적 평화 유지 문제와 제국이 중앙지 분머의 적 통제기능이었다. 이 무렵 대 터키 전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최대 강국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11개의 다른 민족이 통합된 다민족 국가로 성장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강인한 프로테스탄트 국으로 등장한 프로이센도 새로운 중심세력을 형성하여 제국 내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전체 군주주의 제도는 독일 안에 예술 개화기를 안겨주었다. 새로운 자아의식이 싹튼 서민들은 계몽사상과 자유주의 신봉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사상의 배태
프러시아의 황제 요셉 2세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이 개혁을 천명한 군주들은 일반대중 서민층들로 하여금 정신적 예술적인 지도자를 찾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빙 무드는 독일과 프랑스 혁명국과의 분쟁으로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에 승리한 독일 영주들은 빈에서 가진 회합에서 독일 내의 39개 군주국을 결속시키는 신성동맹(Heilige Allianz)을 체결함으로서 그들의 체제를 다시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29개 군주국에서는 일체의 민주주의적이고 자치적인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 반면에 독일 내 전국 어디서나 통관 때마다 지불해야만 했던 통관 세제를 없앤 것은 1816년으로, 39개 군주국은 일반 정치분야뿐만 아니라 경제분야에까지 공존 의지로 돌아서며 재통일의 싹을 발아 시켰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봉건 제도에 시달려 온 국민들 가운데서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일부 단체와 그 추종 인물들은 시대적인 변천을 주도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가장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은 1848년 2월에 프랑스 급진파들이 주도한 혁명이었다. 이들은 루이스 필립 왕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건국하는데 까지 성공하자 이 조짐은 급기야 독일 각 군주국으로 크게 파급해 나갔다. 이 같은 급진주의 운동은 헝가리의 혁명(3월 13일)으로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서 빈, 베를린, 이태리, 등지로 퍼져 나갔다. 1848년 혁명운동을 통해서 국민적인 감정이 정치적인 성숙을 가져다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민회의(10월31일)에서 민주주의 국민 헌법까지 채택하는 진일보를 했으나 외세가 전혀 끼이지 않은 조국통일은 다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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