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아직도 음력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다시 한 번 새해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건 나름대로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지만, 사실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이 있음으로 해서 약해졌거나 이미 무효화되어버린 다짐과 계획들을 다시 한 번 추스를 수 있으니 두 번 새해를 맞는 것이 비효율적이거나 낭비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의 경우 한번은 처가에서 한번은 본가에서 보냄으로써 남녀평등에 유익이 되기도 하고, 한번은 부모님, 형제자매들과 한번은 내 식구들과 보낼 수도 있으니 그 역시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음식을 장만해서 연일 손님들 접대해야 하는 종가집의 며느리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습니다만...
객지에 부부만 나와 있는 저희 같은 경우는 이런 명절 연휴가 썩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다들 자기 집을 찾아가기 때문에 평소에 만나던 사람들 만날 수 없어 적적함을 느끼게 되고, 연휴로 인해서 생활이 일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함이 많습니다. 여행을 하려 해도 길들이 막혀 움직이기 힘들고, 숙박요금이 비싸 비용이 많이 듭니다.
한국은 설 연휴가 3일이지만, 춘절을 가장 큰 명절로 여기는 여기서는 일주일을 쉽니다. 게다가 학교의 경우는 학생들이 방학 중이라 직원들도 춘절에 이어 3일을 더 쉽니다. 그래서 모두 열흘의 휴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날입니다. 학교는 텅 비어 있지만,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아서 소식을 전하려고 혼자 학교 사무실에 나와 있습니다. 아내는 이번 연휴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고 다그치지만, 특별한 계획이 없습니다. 매일 인근에 있는 작은 산에 등산이나 갈까 하는 게 생각의 전부입니다. 연휴가 끝나면 곧 새 학기 시작이라 새로 개설한 과목의 강의 준비도 해야 하지만, 아내가 집에서 학교 일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니 삼가야겠지요. 매일 수영을 하는 아내는 수영장이 며칠 쉬어서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폭죽 소리에 시달릴 일을 생각하니 그것도 끔찍합니다.
한국도 금년 겨울이 유난히 춥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만의 경우도 이번 겨울이 추웠습니다. 방송에서도 최저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진 날 수가 열흘이 훨씬 넘어서 특별히 추운 겨울로 꼽힌다고 했습니다. 10도면 한국에서는 따뜻한 겨울이라 하겠지만, 난방 시설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는 겨울 내내 자기 체온으로만 추위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춥게 느껴집니다. 바깥에는 따뜻한 햇살이 있어도 더위 때문에 남쪽으로 창을 잘 내지 않는 이곳에서는 집안이 대단히 썰렁합니다. 그래서 추운 집안에서 혼자 낮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내는 한국에서는 잘 입지 않던 두꺼운 오리털 파카 같은 걸 이곳에서 더 애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온갖 겨울옷들이 이곳에도 다 있고,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옷들을 사서 입고 다닙니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마당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도 지구 온난화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일까요?
학생들은 지난 1월 17일부터 겨울방학에 들어갔습니다. 방학 초기에 교목실에서는 3일간 겨울 신앙생활 캠프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는 대만장로교 총회에서 주관하는 청년 대상 겨울 성경 세미나가 저희 학교에서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400여 명의 제법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방학입니다. 그리고 오는 14일부터 2학기 개강입니다. 이번 학기에 다시 영어성경읽기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아직 정원 미달이라 또 폐강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번역과 학생들을 독려해 달라고 언어센터에 부탁을 했습니다만, 과연 채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철학 과목은 학생 수가 120명 내외인 큰 반을 두 개 맡게 되었습니다. 강의도 강의려니와 학생들로 꽉 채워진 좁은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잘 관리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필수 과목이어서 억지로 듣는 과목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잘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막 맞은 지난 1월 4일과 5일에 대만의 여러 방송과 언론들은 대만에서 가장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냈던 사람의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름은 왕 샤오밍(王曉明)으로 사망할 때의 나이는 64세였는데, 식물인간으로 지낸 기간은 47년이나 되었습니다.
왕 샤오밍 씨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그녀의 나이가 17세였던 1963년이었습니다. 가오슝에 있는 중샨 여고 밴드부의 지휘자로 주목을 받고 있던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를 하다 택시에 부딪쳐 머리에 중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녀를 돌보았고, 그래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회생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4년 뒤인 1967년 미군의 의료 전용기를 타고 미국 뉴욕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증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지만, 가족들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양 시설에 입원한 상태에서 15분마다 가래를 뽑아내고, 몸을 뒤척여주고, 마사지를 해주어야 하는 일은 힘도 들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었지만,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싫어서 정부의 보조도 받으려 하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그녀를 보살폈습니다.
그렇게 10년,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연히 집안의 경제 사정은 형편없이 나빠졌고, 두 여동생은 학업을 중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샤오밍 씨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996년 가장 중요한 보호자였던 어머니 자오 시녠(趙錫念) 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인 1999년 아버지 왕 레이궈(王雷過) 씨 역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 여동생이 간호를 맡았습니다. 그러다 샤오밍 씨는 작년 3월 64세의 나이로 47년간의 병상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가 죽고 나면 더 이상 딸을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해서 딸이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도록 안락사를 허락해 달라고 정부에 진정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문제는 다시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됐지만,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여동생들이 어머니의 진정에 반대를 했습니다. 그들은 (물론 어머니도 그랬겠습니다만) 샤오밍 씨가 비록 식물인간이긴 해도 의식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 의하면 어떤 때는 의사 표시로 눈도 깜박이고 미소도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입원해 있던 요양원의 원장은 부친의 소망 소식을 전했을 때 샤오밍 씨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샤오밍 씨는 다시 잊혀졌고, 작년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최근 가오슝 시와 현이 통합되면서 자료를 정리하던 중 시정부의 한 직원이 그녀의 장애인 수첩이 말소된 것을 발견하면서 알려졌습니다.
안락사 문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뜨거운 논쟁거리이지만, 어디에서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만의 경우 작년 6월 말기 암 환자 같은 말기 환자의 경우 가족이 동의할 경우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 초안이 통과되었다고 하는데, 이 법률도 식물인간의 경우는 치료중단 허용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작년 5월 21일 대법원이 식물인간 상태로 진단된 환자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은 초보적이고 대단히 조심스러운 단계에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는 누구라도 동의를 하겠지만, 과연 어떤 선택이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켜 주고 생명을 존중하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참고로 유사하지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용어들의 차이를 설명한 신문 기사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존엄사 판결을 계기로 뇌사와 식물인간, 존엄사와 안락사 등의 차이점을 알기 쉽게 정리해 본다.
◇ 뇌사 = 뇌사는 뇌의 활동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의학적으로는 생명을 을 주관하는 뇌간(숨골)의 기능이 정지됐고 이로 인해 모든 반사작용이 없거나 무호흡 증상이 모두 확인될 때 뇌사로 진단한다.
◇ 식물인간 = 식물인간 상태는 심장과 폐 기능이 작동을 멈춰 심한 저산소성 뇌손상을 받은 환자들이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경우를 말한다. 식물인간은 뇌 중에서 대뇌의 전반적인 손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뇌사와 다르다. 반면 뇌사는 대뇌를 포함한 뇌간(숨골)이 손상을 받아서 발생한다. 따라서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환자는 호흡중추가 뇌간에 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공호흡기가 식물인간 여부를 결정하는 잣대는 아니라는 게 대다수 의료인의 분석이다.
◇ 존엄사 = 존엄사는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한다.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인 치료를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는 의학적 치료가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치료의 중단으로 생명이 더 단축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안락사 = 안락사란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생명을 마감시키며, 질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존엄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 중에서도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해서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뜻한다. 또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의 경우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 제거가 가능토록 한 만큼 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호스피스·완화의료제도'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대신 적극적 안락사든, 소극적 안락사든 모두 반대하는 점을 들어 이번 판결이 소극적 안락사와는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가톨릭과 같은 종교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제도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종교계에서나 세계보건기구(WHO) 등에서는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안락사를 예방하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 호스피스·완화의료 =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죽음이 임박한 말기환자에게 '무의미한 치료'를 환자의 자율적 결정대로 시행하지 않는 대신 훈련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와 자원봉사자가 환자의 통증 등의 다양한 증상에 대해 치료와 심리적, 영적 상담을 시행하면서 품위 있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 무의미한 연명치료 = 무의미한 치료란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인 치료를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학적으로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신투석 등 생명유지기술들이 발달했지만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말기환자의 경우에는 고통을 연장할 뿐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윤리적 측면에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치료'는 의학적으로 회복이 가능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호흡 정지와 심장 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있을 때 시행되는 '의미 있는' 생명연장치료를 중단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경우는 생명연장치료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기 �문에 의료인들은 최선을 다해 심폐소생술과 중환자실 집중치료 등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 사전의사결정제도 = 이 제도는 죽음이 임박하지 않은 시점에서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명연장치료의 시행 여부에 대한 결정을 미리 개인의 의지와 선호에 의해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의료계에서는 이를 두고 환자의 자율적 의지를 존중하는 인본적인 제도라고 평가한다.
사전의사결정제도는 미국과 대만, 프랑스 등에서 이미 도입해 시행 중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제도화를 위해 필수적인 장치라는 게 이 분야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모든 일에는 바른 원칙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원칙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사랑이 중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사랑의 행위냐 하는 데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불완전한 데다 불순한 생각이 개입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바로 이 핵심적인 부분을 우리는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다툼이 생기고 불행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영원한 불변의 진리는 사랑이요, 진정한 지혜는 정직과 겸손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올해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게 되기를 기도드리며,
저희 부부를 향한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2011년 2월 첫날
대만에서 구창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