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을 사는 길 위에서 여러 개의 길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길로 나아가는 모험도
의미 있는 길이라고 노래했다.
내 가는 길,
길 위에 서있는 나,
어떤 길로 나아가고 있나?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
8.15 해방 전이었다. 충남 공주에 7남매의 셋째인 한 한 소녀가 있었다. 위로 오빠가 둘이 있었고 딸로서는 장녀였다. 아버지는 공주 읍에서는 유지였고 부 읍장이셨다. 그 해 8월 16일 한 낮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은 그가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에게서 바느질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둘째 오빠가 무어라 크게 고함을 치며 집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는 오빠 뒤로 뽀얀 흙먼지가 일어났다. “어머니, 해방이 됐어요, 해방!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했대요.” 소녀는 해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부 읍장이던 자기들의 집으로 모여들어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해방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개학 후 소녀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소녀를 특별히 예뻐해 주던 상급생 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소녀에게 아주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따라간 곳이 아주 작은 교회였다. 소녀는 그 곳에서 생전 처음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이란 말을 들었다. 그 교회는 해방과 함께 막 생겨난 교회였다. 소녀는 이전에는 공주에서 한 번도 교회를 본 적이 없었다. 공주 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당이 한 곳 있기는 했었다. 사람들은 그 곳을 뾰쪽당이라고 불렀고 그 곳에 가까이 가면 큰 일 난다고 했다. 사람의 얼이 빠지거나 죽는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그 곳에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고 멀리서 까만 옷을 입은 신부와 수녀들을 신기하게 보기만 했다. 그런데 소녀가 처음 가 본 교회는 소녀의 정신을 쏙 빼 놓을 만큼 재미가 있었다. 선생님이 해 주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풍금소리에 맞춰 부르는 찬양과 율동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녀는 주일마다 상급생 언니와 함께 빠짐없이 교회를 나갔다. 이듬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호롱불을 켜들고 교인들의 집을 돌며 새벽송을 부르기도 했다.
그때 공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공주여자사범학교가 있었다. 소녀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쟁률이 높던 공주여자사범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6.25가 터졌다. 오빠들은 군에 징집되었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아버지는 병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하시며 피난가기를 포기 하셨다. 며칠 후 인민군이 공주를 점령하자 적지 않는 사람들이 인민군을 환영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민군을 환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 읍장이던 자기들의 집에서 일을 하던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군인과 경찰가족들의 재산을 마구 빼앗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9.28수복이 이루어졌다. 공주 읍에는 또 한 바탕 피비린내가 일어났다. 공산당에 의하여 재산을 빼앗기거나 고통을 당했던 군인과 경찰 가족들이 이번에는 부역자들에 대한 보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집에 일꾼으로 있다가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도 소녀의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려 왔다. “세상이 험악해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겠나. 괜찮으니 돌아들 가게.” 아버지는 그들을 조용히 돌려보냈다. 휴전이 되어 학교를 가니 선생도 학생도 반쯤은 보이지 않았다. 1955년 소녀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시골 땅을 판 돈으로 돈암동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고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소녀도 집안에 무엇인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영문 타이프학원을 거쳐 미 군속기관에 취직을 했다. 저녁에는 야간대학에 등록을 하고 학교도 다녔다. 그 학교에서 이름만 듣던 양주동 선생님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유명한 작가들과 연극 영화계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1985년 어느 여름, 대북 방송 “김삿갓 북한 방랑기” 연출을 맡고 있던 PD가 소녀에게 연속극 출연을 제의해왔다. 그 연속극은 “청춘기상도”라는 것이었다. 당시 텔레비전 방송은 녹화가 되지 않아서 생방송을 했다. 연습을 한 후에 그대로 연기를 해야 했는데 이 생방송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옛날이야기이죠. 그런데 이 연극에 출연한 얼마 후에 그가 명동을 지나는데 한 신사가 길을 막으며 잠간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 분이 바로 중앙영화사 사장이었다. 그는 “어디로 갈까?”란 영화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소녀에게 출연을 제안했다. 그는 “청춘기상도”에 출연한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녀는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신문들은 “신인탄생”이란 제목으로 그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크게 알려진 것은 “가는 봄, 오는 봄”이란 영화가 크게 히트를 하면서였다. “가는 봄, 오는 봄”은 한국전쟁을 테마로 한 영화였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옥이란 아이가 성장해 두 청년(두 청년은 최무룡씨와, 이대엽씨가 역할을 맡았다.)의 도움으로 가수가 되고 어머니까지 찾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무렵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인지 영화를 상영한 국도극장 앞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 달간 끊이지 않았다. 소녀는 극중의 18살의 옥이 역을 맡았고 그 영화가 히트를 하자 전국극장에서는 옥이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순식간에 유명 영화인이 되었고 라디오와 TV와 영화를 종횡무진 누볐다. 그 후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영화가 히트하면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문제는 그러면서 그는 교회를 멀리 떠나갔다. 공주읍에서 교회를 다니며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느님의 손길은 그를 찾아왔고 자신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현실이 더 가깝고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특별히 그녀의 여덟 살 아래인 여동생은 그를 위해 애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만날 때마다 교회를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마다 적당한 핑계로 동생의 요청을 거절해왔다. 이 무렵 그는 어떤 군인장교와 교제를 했는데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했었지만 결국 성격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살기로 다짐했다. 그만큼 그 일은 그에게 큰 아픔과 상체기를 남겼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음의 상체기도 아물어 갔다. 그러자 모 대학에서 천문기상학을 강의하던 교수와 사귀었고 마침내 그와 결혼을 했다. 첫 딸도 태어났다. 그런데 대학교수이던 남편이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에 출마를 했다. 그것도 정당공천이 아닌 무소속 출마였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녀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한 때는 한국을 주름잡던 여배우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표를 위해 애걸해야하는 고통은 참으로 괴로웠다. 많지 않던 재산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러고도 떨어졌으니 이제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재산도 명예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도 사라졌다. 선거운동을 하느라고 겪은 고통은 선거후의 후유증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선거에서 떨어지자 빚을 준 사람들의 독촉전화가 빗발쳤고 그녀는 전화벨 소리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만큼 그는 부서지고 깨어졌다. 더 내려 갈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그러자 외롭고 공허했다. 공연히 서글프고 눈물이 났다.
.....
그때 그의 여동생이 기억났다.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도 애타게 기도하던 그 여동생이 생각났다.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교회를 가고 싶다고 했다. 혼자서는 교회를 갈 힘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동생의 손에 이끌리어 교회를 갔다. 꼭 20년만이었다.
화려하고 바쁘게 생활할 때에는 주님을 잊었다가 이제 한없이 나약해진 모습으로 교회를 찾았으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수건이 흠뻑 젖을 만큼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렇게 울고 나니 웬일인지 마음이 평안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 마음은 평안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쁨이 마음에 가득했다.
하느님이 그를 다시 찾으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그가 겪었던 모든 시련과 아픔은 모두 그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믿음을 가졌고 새로운 용기도 가졌다.
그리고는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주변에는 그가 겪었던 것과 꼭 같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연예인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연예인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녀가 바로 배우 전계현이다.
[01 Aug.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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