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독일 국가형성의 시작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9. 7. 18:33


얘들아,

독일 국가가 형성하게 된 그 시초에 대하여 살펴보자꾸나.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왕으로 선출되었지.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단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단다. 그는 헝가리에 대한 곡물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단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 대제야.

 

오토 대제는 재차 침입해온 헝가리 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독일 국가권력의 강화를 추구했단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국가교회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관직을, 즉 봉건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령에 대한 왕의 보호를 약속했어. 왕과 성직자의 이러한 결속은 봉건영주들과 정치적 균형을 가져와 왕권이 강화되었지. 오토는 곧 북이탈리아를 점령했으며(이후 북이탈리아는 독일 왕들, 즉 신성로마제국의 끊임없는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황제(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받게 된단다. 황제는 로마교회를 보호하며, 그 대신 교황은 황제가 보유한 이탈리아내의 영토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독일역사에 있어서 숙명적인 비극이 된단다.

 

이 이탈리아 문제는 독일 내에 황제국가건설에 반작용 역할을 하게 됐어. 이후 독일 왕들, 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독일국내의 문제보다는 이태리문제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됨으로써 스스로 왕권약화를 초래하게 되었지. 한편, 슬라브족의 땅을 점령하면서 Markgraf라는 공작들을 점령지역(Mark라 호칭함)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단다. 오스트리아도 Ostmark라는 변경의 한 주였어. 이들 슬라브 지역은 점령되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독일이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단다. 브란덴부르크 Mark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었으며, 뮌헨주변은 훗날 오스트리아로 발전하였지.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있었고, 주교임명권을 주장하고 있었지. 황제는 스스로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제는 독일국가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단다. 황제의 서임권은 강력한 황제권의 밑받침이었던 것이야. 그걸 내놓을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단다.

 

그러나, 교황은 달랐어. 11세기 무렵의 교황들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클리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을 이끌던 이상주의자들이었지. 매우 이상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어. 성직자들의 임명권(서임권)을 왜 세속군주가 갖고 있는 지에 대해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단다. 교황은 당연히 서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나섰고, 세속군주로서는 그것을 교황에게 돌려줄 수 없었어. 그래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서임권 투쟁(the Investiture Contest)이란다.

 

고조되어 가던 교회와 세속의 갈등은 결국 하인리히 4세(독일 황제)와 그레고리 7세(교황) 때에 폭발했지. 이것이 1077년에 발생한 저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란다. 반황제적인 독일국내의 귀족들이 교황과 결탁하였고, 교황은 서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지.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게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놋사에서 굴욕하고 만 것이야. (그러나 몇 년 후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를 병사시킴으로써 멋지게 복수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교황과 세속군주간의 서임권 관할문제만은 아니야, 그것은 중앙집권(황제)와 지방분권(귀족)의 대립이며, 신정정치체제와 세속군주정간의 권력쟁탈전이었어. 이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이 '서임권 투쟁(the Investiture Contest)' 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