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독일, 국가와 교회간의 서임권 싸움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10. 4. 17:26


얘들아,

서임권 투쟁의 역사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인식하게 했던 대단한 사건으로서 이후 종교와 세속 권력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중요한 교훈을 주었단다. 권력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 또 어떻게 갈등이 아니라 협력하며 지내느냐 하는 관계성을 알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지.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있었고, 주교임명권을 주장하고 있었지. 황제는 스스로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제는 독일국가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단다. 황제의 서임권은 강력한 황제권의 밑받침이었던 것이야. 그걸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않되는 이리라 생각했을 거야.

 

그러나, 교황은 달랐어. 11세기 무렵의 교황들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클리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을 이끌던 이상주의자들이었지. 매우 이상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어. 성직자들의 임명권(서임권)을 왜 세속군주가 갖고 있는 지에 대해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단다. 교황은 당연히 서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나섰고, 세속군주로서는 그것을 교황에게 돌려줄 수 없었어. 그래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서임권 투쟁(the Investiture Contest)이란다.

 

고조되어 가던 교회와 세속의 갈등은 결국 하인리히 4세(독일 황제)와 그레고리 7세(교황) 때에 폭발했지. 이것이 1077년에 발생한 저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란다. 반황제적인 독일국내의 귀족들이 교황과 결탁하였고, 교황은 서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지.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게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놋사에서 굴욕하고 만 것이야. (그러나 몇 년 후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를 병사시킴으로써 멋지게 복수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교황과 세속군주간의 서임권 관할문제만은 아니야, 그것은 중앙집권(황제)와 지방분권(귀족)의 대립이며, 신정정치체제와 세속군주정간의 권력쟁탈전이었어. 이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이 '서임권 투쟁(the Investiture Contest)' 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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