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
1970년대 이후, 유럽통합 노력은 유럽통화제도와 정치통합에 집중됐단다. 공동농업정책과 지역정책 등 많은 정책이 수행되었지만, 모든 노력은 유럽통화제도(EMU)로 이어졌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유럽정치협력(EPC)이 가속화되었다. 공동농업정책, 사회정책, 지역정책 등의 문제들은 재정문제로 항상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통화제도의 필요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CAP에 나타난 재정조달방식의 변화는 보다 효과적인 통화기구를 설립할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1969년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1980년에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을 창설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1970년 3월 6일에 모든 회원국들의 중앙은행장들과 협의하여 EMU에 대한 여러 가지 안을 검토할 베르네위원회를 구성했다.
동년 10월 17일에 제출된 베르네 보고서는 EMU의 실현을 위하여 공동체의 대대적인 개혁을 제안하게 되었다.
첫째는, 국가차원이 아닌 공동체 차원의 경제통화정책을 결정할 독립된 유럽중앙결정기구의 창설,
두 번째, 미국의 연방화폐 보유시스템을 모델로 한 공동체 시스템의 중앙은행설치.
동년 10월 29일에 각료이사회에 제출된 집행위원회의 제안은 베르너 보고서보다 훨씬 신중했지만, 회원국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심각했다. 특히 모든 부담을 지기 꺼려하던 서독과 초국가기구 창설에 결사반대였던 프랑스로 인해 대립은 심각해졌다.
EMU에 대한 견해가 달라 난항을 거듭하던 협상은 이듬해인 1971년 2월 9일에 가서야 겨우 타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타협에 성공하여 이제 막 실행에 들어가려던 EMU는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제적인 경제 불황과 통화위기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70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시작된 국제통화위기 앞에 EMU를 위한 첫 프로그램은 실행도 해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미국의 횡포로 빚어진 국제통화질서의 대 혼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던 EEC였지만 서로가 처한 상황의 차이와 유럽 고유의 통화시스템의 결여로 공동체 차원의 대응이 어려웠다. EEC 국가들은 경제통화연합의 실현이라는 공동체적 해결책과는 상반되고,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가차원의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독자적인 위기 탈출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통화위기로 크게 흔들린 EEC는 경제통화연합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그 밖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을 수 없었다.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nion)은 EC발전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핵심사항이었다. 통화동맹은 진정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통화동맹은 재정정책, 조세의 평준화, 단일경제, 그리고 나아가 단일화폐 등에 대한 초국가적 결정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었다. 요컨대 이들은 정치통합을 이루는데 필요한 선결 요건들이어서 통화동맹은 실로 많은 장점을 가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경제동맹과 통화동맹 중 어느 것을 첫 단계로 하느냐로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1970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국제환경도 이 EMU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베르너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경제동맹과 통화동맹 중 어느 것이 EMU를 향한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채 남게 되었다.
통화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snake' 라고 불리는 소폭변동환율제가 도입되었으나, 이것은 공동체의 운용과 정책에서 결코 효과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snake가 실행되는 시점에서 이탈하였고, 프랑스는 snake에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했다. sanke는 서독을 위시한 어느 정도 통화안정을 이룰 수 있는 국가들로만 유지되었습니다. 통화동맹의 문제는 각 국 간 경제정책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새로운 변동환율제도에 대한 불신이 증대되었다. 급격한 환율변동의 위험 때문이었다. 변동환율제도의 실시와 함께 통화를 운용하는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EC에게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새로 집행위원회 의장이 된 젠킨스에 의해 유럽통화제도(EMS)에 대한 의견이 최초로 제시되었다. EMS는 베르너 보고서에서 주창된 완전한 형태의 통화동맹은 아니었으며, 슈미트, 젠킨스, 프랑스의 데스텡 등은 이 제도를 정치연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EMS는 통화동맹으로 순조롭게 발전했다. EMS는 브레턴우즈 체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EC를 강화시키는 최초이며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EMS는 각 회원국 통화와 연계된 '환율조정장치(ERM : exchange rate mechanism)'를 제공하였고, 상대국 통화에 대한 자국 통화의 시세 변동율 허용 한계를 설정했다. ERM은 각국 화폐와 병행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유럽통화단위(ECU : European Currency Union)' 의 설립을 통해 보완되었다. EMU는 1970년대 수준에 비하여 환율 불안정성을 현저히 감소시키는데 성공 했다. ECU는 EC 역내에서 계산 기능을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외에서 금융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EMS가 공동체를 총괄할 수 있는 영역이 없었다는 점이다. EMS의 설립은 통합으로 가는 여정에서 중요했다. 이것은 각 회원국에 협력정신을 고취했다. 그렇지만 EMS는 회원국들의 정치적 타협과 경제적 필요로 생겨난 것이었다. 완전한 형태의 통화동맹이 되기 위해서는 EC가 공동통화정책을 수립하는 일뿐만 아니라, 단일화폐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일까지 고려해야 하나, 이것의 실현을 국가주권과 직접 충돌하는 일이었다.
EMS는 국가 주권에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오히려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EC는 1989년에 가서야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게 됐고, 유럽이사회는 이 문제와 관련한 들로르위원회의 보고서를 수용했다. 이 사실은 EMS의 한계를 넘어선 결정적인 조치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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