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새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무엇이나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것을 찾기 위해 모여든다. 학계에서는 해마다 새로운 학설이 쏟아져 나오며 상업계에서는 이 새 학설을 토대로 새 상품을 만들어 낸다. 같은 상품일지라도 해마다 새로운 모델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현대인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하여 새로운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 최상급을 붙여서 “최신”(最新)이라고 했을 때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기에 최근 전자업계에서는 상품의 수명이 불과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아 부단히 최신 상품을 개발해 내기에 골몰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인간의 가장 “오래 된” 옛 이야기를 통하여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오래 된 구약성서를 현대인을 위한 새로운 해석으로 풀이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는 세상 창조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옛 이야기 속에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주는 가장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성서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다가 인간의 과오로 인해 그 동산 밖으로 쫓겨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에덴동산을 “생명나무”가 있는 곳, 즉 사람이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영원한 본향이라고 보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마구 자란 에덴동산 밖을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현대인의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안타까워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상생해 본다.
현대인은 에덴동산 안에서 마구 뛰노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런데 동산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고, 또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부모의 명령이 자신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는 동산 밖의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려 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에덴동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동산 밖의 세상은 그가 생각하던 자유 천지와는 달리 고뇌와 번민과 해산의 고통과 수고의 연속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깊은 숲속이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깊은 숲속에서 집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점점 더 멀어지듯, 현대인은 앞을 가린 가시덤불 숲속에서 방향을 잃고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동산 안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했을 터인데 공연히 무모한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막심했으나, 그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댓가는 이미 쏟아진 물과 같았다.
복음서의 비유에 보면 탕자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를 뉘우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으나, 현대인은 돌아가 백배 사죄할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고향으로 다시 가려고 하지만 도저히 그 길을 찾지 못하니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해산의 고통과 같은 아픔을 참아 가면서도 그 동산을 다시 찾아 가려고 가시덤불 숲속에서 안간힘을 쓸 뿐이다.
바로 그때 어떤 낯선 젊은이가 이 현대인의 등 뒤로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현대인이 놀라서 몸을 돌려 그 젊은이를 쳐다보니,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동산으로 가는 길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현대인은 그 말에 움찔한다. 왜냐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마음을 스쳐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동산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 낯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 길을 안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것인가?’ 현대인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 젊은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나는 저 동산 주인의 큰 아들로서 동산과 이 가시덤불 숲 전체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기에 이쪽 지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한다. 그래도 현대인은 얼른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마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했던 것처럼, 현대인은 그 젊은이에게 다시 캐묻는다. “당신이 저 동산 주인의 큰 아들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그때 그 젊은이는 자기의 두 손과 허리와 두 발을 가리키면서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찾아오느라고 이렇게 가시에 찔리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한 뒤, 그는 현대인 앞에 피가 흐르는 그의 두 손을 펴 보인다. 그제서야 현대인은 그 젊은이 앞에 무릎을 꿇고,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뒤 말했던 것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한다.
사람의 철학과 문학은 사람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성서 역시 고대 근동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들의 낙원인 에덴동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동산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창세기 2,9)가 있었다고 기술한다. 성서는 “사람의 타락”을 생명나무의 동산과 가시덤불의 세상이라는 이미지를 빌어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가리켜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는 기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뚜렷해진 것이다.
나는 위의 이야기에서 동산 주인의 큰 아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찾아 왔다는 이미지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요한 14:6)라고 한 말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구약성서에도 신약성서 못지않게 그분이 인간을 찾는 기록이 많이 담겨져 있다. 우선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만 보더라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라는 하느님의 질문을 우리는 읽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구약성서와 현대인의 관계를 공룡의 발자취의 화석과 과학자와의 관계로 생각해 본다. 현대인 중 그 어느 누구도 공룡이 이 지구 위에 살던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도 없고 또 공룡을 실제로 본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사 박물관에 가면 공룡의 실체 모형을 볼 수 있으며 자연과학사 책 페이지에서는 여러 형태의 공룡 그림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과학자들이 상상으로 그려낸 것들이다. 그렇다고 없었던 것을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공룡의 발자국이 남긴 화석을 보고 그 정도의 발자국이 압력을 받기 위해서는 발의 크기는 어느 정도 되었을 것이며 또 그 정도 크기의 발을 가진 짐승은 어느 정도 크기의 몸체를 가졌을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조그만 발자국 화석 하나를 가지고 공룡의 원모습을 “재생”(再生)해 낸다.
마찬가지로 나는 구약성서를 야훼 하느님이 인류 역사 위에 남기신 발자국이라고 본다. 온 인류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고, 그것이 구약성서로 수집되면서 곧 야훼 하느님의 발자국이 인류 문명 위에 남겨진 하나의 유산이 된 것이다.
나는 유다 땅 빈들 요단강 곁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가상해 본다. 현대인은 팔레스타인의 어느 황량한 벌판에서 야훼의 발자국 화석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는 그 화석 옆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그 패인 자국을 더듬으며 어느 쪽이 발가락 부분이며 어느 쪽이 뒤꿈치인가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패인 정도를 헤아려 뒤꿈치가 받은 압력이 어느 정도이며 그 같은 무게를 가할 수 있는 체중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하는 것도 헤아려 본다. 바로 그때 현대인은 직감적으로 그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어느 젊은이의 입김을 느껴 몸을 돌려 보니 그 자리에는 아니나 다를까 자기와 똑같은 인간 모습을 띤 어느 젊은이가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 젊은이는 웃으면서 “당신은 지금 그 발자국의 주인공의 모습을 알아보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자신의 모든 과학적 지식과 사람의 재능을 총동원하여 이 신비한 화석의 정체를 가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엉뚱하게 나타난 젊은이가 감히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 점에서 당혹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 젊은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현대인의 질문에 대한 그 젊은이의 답변은 간단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7~9).
예수의 이 말씀은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세례 요한도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를 맞이했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가 1:11)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나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비록 우리의 현대적인 과학적 지식과 재능으로도 그 실체를 가려내기가 힘들다고 본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자기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준다면 우리는 그분을 본 것처럼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 빌립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의 내용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신학적인 술어로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하나의 불가분(不可分)의 계시서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살아 계시는 그분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글 / 장일선 '생명나무와 가시덤불'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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