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노폭(Norfolk, Virginia)에 자리하고 있는 더글라스 맥아더 재단(The General Douglas MacArthur Foundation)에서는 1975년부터 2년마다 심포지엄을 열어왔다. 심포지엄은 “미국의 일본 점령시기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1986년도에는 ‘한국전쟁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삼았다.
1986년 심포지엄 보고서의 제목은 「The Occupation of Japan: The Impact of the Korean War」으로써, 1990년에 미국과 일본 양국에서 출간되었다. 보고서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 중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한다.
* 리처드 핀(Richard B. Finn), 「승리를 대신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맥아더는 두 가지 기본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정치적 정화이다. 일본 방위군을 강화하기로 결정한 맥아더는 불과 석 주 만에 ‘예비 경찰대’를 창설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가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5년 동안 완강하게 거부해왔던 정책을 뒤집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결정을 일본의 ‘재무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의 국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순전히 방위적인 정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재무장이었다. 방위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재무장이었다. 1951년 2월, 미국은 일본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일본은 5만 명의 자위대를 창설했다.
결론적으로, 만일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의 조기 재무장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일 간의 평화조약도 그렇게 빨리 성사되지 못했다.
* 콘도 시게카쯔(Kondo Shigekatsu), 「한국전쟁에 대한 일본의 반응」
한국전쟁 발발 직후, 요시다 수상은 ‘한국전쟁은 공산 세력이 일본을 향하고 있으며, 일본이 위협에 직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시다 수상은 미군의 요청에 의해서 일본 ‘해양안전부’의 기뢰제거 부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일본 작전병력은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인천과 원산 등에서 46차례에 걸쳐 기뢰제거 작전에 투입되었다. 작전이 진행되면서 그 중에 한 명이 사망하고 여덟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시작된 미일 간의 평화협상의 주요 의제는 ‘일본이 독립한 이후 일본의 안보에 대한 보장’ 문제였다.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미국은 지상군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고, 일본의 지상군 무장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은 일본에게 재무장을 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요시다의 1950년 7월 8일자 편지에 의하면, 맥아더는 갑작스러운 명령을 전달했는데, 일본 정부로 하여금 칠만 오천 명의 ‘예비 경찰대’를 창설하여 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공백의 채우라는 것이었다.
* 후지따 쿠니꼬(Fujita Kuniko), 「한국전쟁이 도요타 자동차 회사에 끼친 영향」
한국전쟁은 일본의 경제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대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일본 경제는 회생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시기에 도요타 자동차 회사는 노사협력 복지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생산체계를 정비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노조는 이미 전투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관리부는 노조를 철저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주문이 급증함에도 불구하고, 향 후 몇 년 동안 도요다 회사 측은 노조의 과격한 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하여 단 한명의 생산직 노동자도 더 이상 고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노동자에 대한 회사 측의 훈련과 교육이 체계화 되었다. 1951년에 선임자에 대한 임금제도가 채택되었고, 추천 제도가 시행되었다. 1956년부터 도요타는 임시직을 고용함으로써 노동력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듬해의 노사 협상에서 노조는 임시직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해주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별 수요는 도요타로 하여금 생산력을 끌어 올리게 했다. 노사위원회는 재고를 줄이고, 생산단가를 절감하며, 전체 노동력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도요다의 엔지니어 타이치 오노(Taichi Ohno)는 ‘정시 맞춤 시스템(just-in-time)’을 고안해야 할 책임을 맡았다. 오노는 불필요한 재고를 없애고, 작업하지 않고 허비되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생산력 향상시켜, 생산단가를 절감하고자 했다. 오노는 1953년까지 생산관리부를 맡아, 생산라인을 관리했다. 이 기간 동안에 생산물량은 급증했지만, 도요타는 결코 노동력을 보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수요 증대는 도요다로 하여금 가격 경쟁력을 갖춘 승용차 대량생산 체계를 완성할 수 있게 했으며, 승용차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했다.
* 셔우드 파인(Sherwood M. Fine),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에 끼친 영향」
한국전쟁의 발발은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몰락했던 일본 경제에 극적인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의 전반적인 성장에 주도적인 요건이 되었다. 유엔군의 물자조달로 인해서 우선 섬유산업, 기계, 화학, 그리고 금속산업 등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는 더욱 극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 발전의 속도, 산업 발달의 범위, 산업 분야에서 국제 경쟁력의 확보 등, 경제 전반에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1950년대에 일본 경제가 이룬 성장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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