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Di/말과 말들...

우크라를 모를 수 있는 내 친구들을 위해…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2. 7. 03:59

키예프의 추모공원 입구에는 엄청 연약하게 생긴 소녀가 아주 슬픈 표정으로 손에 밀을 한줌 들고 있는 서 있다.
그녀의 등 뒤에는 기억의 촛불이 있다. 이 묘지 공원의 기억비는 ‘홀로도모르’를 연상시킨다.

‘홀로도모르’란 무엇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었으나 1919년 종속국으로 소련의 공동체에 흡수되어 지배당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스로를 폴란드와 같은 중유럽 국가, 러시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가 아닌 중유럽 국가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때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스탈린은 식량 안보를 내세워 1932년 식량확보를 위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더 이상 모스크바에 대항하지 않도록 인공 기근을 일으켰다.
목표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똑똑하게 가르치기" 위해 곡물 땅을 빼 았다. 그래서 곡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빵 한 덩어리 없이 남게 되었다.

홀로도모르의 절정은 1933년 봄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매 순간 17명이 굶주림으로 죽었고, 매 시간 1,000명 이상, 매일 거의 24,500명 이상! 사람들은 말 그대로 거리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다음 인구 조사 때, 엄청난 인구 감소가 발생했다. 소련 정부는 인구조사를 취소 그문서를 파괴하였다.
이 사건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총에 맞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대량감소의 진실을 숨기기기 위해서다.
스탈린은 이곳에 러시아인들을 강제이주 우크라이나 마을에 정착시켰다. 오늘날 전 세계 28개국은 우크라이나인들의 학살로 홀로도모르를 대표한다.
학교에서는 이 역사에 것에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증거가 파괴되고 피해자들이 수십 년 동안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공동매장지는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나 그 역사는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지금 글로, 영화로 입소문으로 전파되어 간다.

홀로도모르는 그때의 저항을 상징이었다. 그리고 독립에 대한 욕망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침공은 또 다시 우크라 민간인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글, 우크라 익명





[13.März. 2022]

#돔바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