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75일이 지나면” [곽재구]

행복나무 Glücksbaum 2023. 7. 15. 17:29

우리 집에는 모두 다섯 대의 전화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핸드폰이 있구요. 대학생인 형과 고등학교 2학년인 누나에게도 핸드폰이 있습니다. 나머지 한 대는 일반전화이지요.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전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빠는 운전을 하며 멋지게 핸드폰을 걸거나 받습니다.

출장을 가실 때나 낚시질을 가실 때도 꼭 핸드폰을 챙겨 떠납니다.

회사에서는 엄마에게 하루 두 번씩 전화를 합니다.

󰡒설거지는 다 끝냈소?󰡓

애들 학교는 다 갔소?󰡓

󰡒오늘 저녁에는 회사 회식이 있소󰡓

주로 이런 이야기를 엄마와 주고받습니다.

 

엄마는 좀 더 적극적이랍니다. 화장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 전화기는 엄마에게 필수품입니다.

동창 아줌마, 동네 안경 가게 점원, 미국에 사는 삼촌,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 내가 다니는 미술 학교 선생님, 백화점 문화센터, 미용실, 족발집, 세탁소, 꽃가게, 생선가게, 열쇠집.

엄마의 전화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어느 때는 거실에 앉아 두 세 시간 정도 한 통화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동네 슈퍼로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갈 때도 전화기는 꼭 챙겨 들고 가지요.

 

형은 취미가 좀 괴상합니다. 먼저 얘기하자면 형의 취미는 새벽에 전화 받기입니다.

한참 잠이 든 새벽 세 시나 네 시에 오는 전화를 받으면 하루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한번 잠이 들면 도둑이 들어 업어간다고 해도 모를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형의 친구들, 특히 여자친구들은 새벽 세 시나 네 시에 꼭꼭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누나에게 핸드폰이 필요할까?󰡑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누나는 대학 시험을 준비하며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텐데. 어느 날 밤 이 의문이 풀렸습니다.

누나가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공부하는 모습보다 더 보기 좋았습니다.

󰡒누나, 통화하면서도 음악 들려?󰡓하고 물으니

󰡒, 귀에 더 쏙쏙 들어와.󰡓라며

손가락으로 나머지 한쪽 귀를 가리켰습니다.

, 누나는 음악대학 지망생이지요.

 

주말 오전 같은 때 식구들이 모두 집에 있을 때면 우리 집은 온통 전화 소리에 파묻힙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형은 형대로, 누나는 누나대로 다들 누군가와 통화들을 하고 있지요. 수군수군, 쫑알쫑알, 하하 호호, . 할 말이 저렇게 많을까? 전화요금은 얼마나 나올까, 전화기가 없었다면 우리 집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식구들을 보며 늘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전화기와 아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TV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는데 내용은 북한의 어린이들이 너무 배가 고파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은 중국 땅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구걸을 해서 돈을 모아 식량을 사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도중에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되었습니다. ARS 자동 응답 전화였습니다. 그곳으로 전화를 걸면 한 통화에 천 원씩의 성금이 모아져 북한 어린이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난 설날에 받은 세뱃돈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75천 원. 75번을 전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 전화는 하루에 한 통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어린이를 돕는데 왜 하루 천 원 한 통밖에 할 수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도 매일 한통씩 ARS 자동 응답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걸 때면 나는 북한 어린이와 직접 통화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레곤 합니다. 그런데 내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75일이 지나 내가 빈털털이가 되면 그땐 어떻게 전화를 하죠?

나는 매일 한 번씩 전화하고 싶은데.

방법을 아시는 분 내게 전화해 주실래요?

 

 

작가, 곽재구

'참 맑은 물살'로 제9회 시 부문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서울 세노야>,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 다수가 있다.

 

 

[ 재입력/ 16. Juni 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