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중부 유럽의 원시사회”

행복나무 Glücksbaum 2001. 9. 4. 17:33


애들아, 중부 유럽의 원시사회에 대해서 알아보자꾸나.

세계사를 읽어가다 보면 크로마뇽 인, 또는 하이델베르크 인 인간의 조상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이다.
독일의 중서부 부퍼탈에는 계곡 사이의 언덕 위에서 생활했던 네안델탈 인의 동굴과 집터를 발견하고 그들이 맘모스와 같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낚고 살았던 도구들을 발견하게 되지.
지난번,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을, 방문했을 때 다녀왔던 곳이 부퍼탈이지 않았니? 
네안델탈 인은 인류라고 보기는 힘든 골격을 가지고 있지만
하이델베르크인은 우리 인류에 가깝다고 하는구나.

 1907년에는 하이텔베르크 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독일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학설이 입증된 거야.
중석기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단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게 된 거야.
또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어,
씨족집단 Sippe을 구성하기 시작했단다.
사냥과 불의 사용은 인류에게 급속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고 지식의 축적은 한마디로 혁명적인 삶을 인간에게 안겨주었지.
신석기의 혁명은 독일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어,
독일 통일의 불길이 점화됐던 라이프치히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된 거야.
이때부터 씨족중심의 원시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부족 집단과 같은 귀족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단다.
B.C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지.
농업(사유재산과 일부일처제)과 목축업이 나뉘어 처음으로 분업 형태가 나타나게 된 거야.
이것이 제1차 분업이란다.
수공업의 출현은 제2차 분업,
상업의 출현은 제3차 분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거야.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구나.

 B.C 4세기~3세기에 이르러 게르만족이 형성되었어.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과정으로 생겨난 거야.
독일민족은 처음 부족 연맹체로서 등장했단다. 바이에른, 알레마넨, 프랑켄, 튀링겐, 프리젠, 작센 등, 동일한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관습, 종교, 문화, 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 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초기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정확한 생성과 소멸은 잘 알 수가 없구나.
한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 짓는 종족적 특징들이 반드시 지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또한 부족 간 합병이나 분할도 빈번한 형편이었어.
이때 게르만 전사들은 귀족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지.
처음 Sippe를 중심으로 숲 속에서 살았을 때의 토지는 공유제였던 것 같아.
그러던 것이 점점 경작 시 공동체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어.
어떤 사학자는 이를 중세의 삼포제가 나타나는 계기로 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토지 분할이 매년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던 거야.
지리적 조건 탓으로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던 것 같아.

Mark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은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이 민회는 무장전사들의 공동체였어. 이들은 원시공동체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단다.
이런 이유로 독일 역사가들 중에는 이를 귀족사회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단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보면, 이때의 게르만 족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북동부의 게르만족은 민회 대신에 "제사장-왕"의 지위가 있었다고 해.
민회는 서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공동의 행정기관이 없었으며, 또 전시에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는 했으나, 제도화된 힘은 아니었단다.
아무튼, 고 게르만 사회에서 중요한 계층은 농민전사 층이었어. 귀족계급도 "요청에 따른 복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귀족계급 형성은 로마제국 멸망 그 이후란다.
1~2세기에 라인 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고 해.
로마는 게르만족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토이토부르거 숲의 전투에서 대패한 뒤로는 라인 강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해.
그러나 로마의 라인 강 진출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문명을 전달해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단다.
라인 강 주변의 본, 트리어, 마인츠, 쾰른 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이때 유명한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단다.
로마의 길은 라인강 남단 도시마다 연결하는 길을 만들었고 이 길을 통해서 각 나라의 봉물을 나르는 국제 산업도로가 된 것이지. 그 당시만 해도 게르만족은 야만인으로 취급받았단다. 이후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어.
로마제국 말기에 이르면, 게르만 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되었어.
심지어 부족전체가 로마군으로 입대하는 사례가 발견되기까지 한단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비와 생산도구들을 불하받아, 급속히 귀족계급으로 성장하였지. 그러나 아직은 씨족적인 귀족이었다고 나 할까.
클로드비히가 498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의 귀족들은 초기의 봉건적인 귀족으로 전환하게 되었어. 거의 비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지. 서유럽이나 남유럽에서 노예제 단계를 거쳐 봉건적 귀족계급이 형성된 것에 비추어보면, 고전적(그리스-로마적인) 노예제도 없이 바로 봉건귀족으로 전환한 것은 특이한 일이었어.
아무튼 5~6세기에 프랑크족에 의해 봉건적인 국가가 구성되었으며, 다른 게르만 족 국가들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이후 유럽 역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단다.
이때 프랑크 족은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교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정복지인 고올 지방(지금의 프랑스)의 원주민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을 수 있었어.
이것이 다른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과 달리 프랑크 왕국이 오래 살아남고, 또한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이란다.

751년, Pippin이 교황의 지원을 배경으로 프랑크 왕으로 등장하였는데(카롤링거 왕조의 시작), 이때 피핀이 기증한 중부 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단다.
이 피핀의 아들이 유명한 카알 대제(프랑스어로는 샤를르마뉴)야. 카알 대제는 도나우 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곳에 "Ostmark"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기원이란다.
카알 대제는 자신이 새로 획득한 변방지대에 "마르크(Mark)"를 설치해 나갔다.
카알 대제는 구서로마제국의 유럽 내의 대부분의 영토를 획득했고, 이로써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얻게 되었어.
이것은 로마 교황의 동방 그리스정교회와 갈등관계 속에서 든든한 후원자를 얻기 위한 포석이었지.
카알은 성문법을 만들고, 문법을 정리하기도 했단다.
카알 대제는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단다. 강력한 행정질서를 갖춘 중앙집권국가를 추구하였으나, 실제로는 국가연맹적 성격이 강했으며, 그 힘은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단다.

카알에 의해 봉건제의 기초가 놓였다고 할 수 있지. 주군과 봉신의 개념이다.
사실상 이것은 이전부터 진행해 오던 경향을 제도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알이 이때 정복한 작센은 뒤에 독일국가 형성초기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지.
재미있는 것은 카알은 왕궁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야. 그에 대해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황제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카알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세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지금의 독일의 기원이 되었단다.

진정한 독일의 역사는 843년, 프랑크 왕국이 세 지역으로 나뉘면서부터란다.


[독일역사 이야기, 정우, 정현 1993~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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