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사상, ‘믿음을 통한 의인화’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1. 15. 20:50

교회사에 종교개혁으로 정리되고 있는 마틴 루터의 개혁운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고 믿음의 개력의 그 주안 점이란다. 농민반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루터와 뮌처의 사상을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주장했지. 지금까지 가톨릭에서처럼 교회와 성직자가 매개체가 아니라, 오직 성서만이 구원이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야.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루터는 로마교황파(악마적 지배자라 비판), 제후영주(그들의 사치와 향락을 비판), 농민(당국이 사악하고 부정한 것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악을 벌할 권한은 칼을 차고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의 권한이다. 신에 의하지 않는 권력은 없고, 권력에 반하는 것은 신에 반하는 것이다 : 매우 전근대적인 보수적 사고방식. 14세기 중엽의 Marsilius나 동시대의 마키아벨리와 매우 대조적이다) 모두에 경고를 발했다.
 
Martin Luther는 영주들에게 또한 농민들을 ‘미친 개 잡듯이’ 때려잡으라고 영주에게 충고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1525년에는 농민반란이 진압되었고, 뮨쩌는 처형당하지만, 이후 독일은 신-구교 제후들간 30년간 종교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종교전쟁은 1555년 Augusbur 종교회의로 일단락 짓게 된다. 서로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제후중심으로),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영방을 다스리는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화의의 중심이다. 독일의 교회가 국가 중심의 국가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마틴 루터의 사상은, 비록 보수적이기는 했으나, 많은 분파를 낳았다. 중도파에는 제네바의 칼뱅파, 영국의 퓨리탄(미국의 청교도로 이어짐), 프랑스의 휘그노텐 등이 있으며, 우파는 영국성공회, 좌파로는 재세례파, 퀘이커, Diggers, Levellers등이 생겨났다.

마틴 루터의 경제사상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대두시켰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켰다. 직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 힘쓰는 것이 신의 계시라고 설파했다. 그의 직업사상은 소명의식, 과업의식으로 집약된다.
루터는 근검을 생활원칙으로 하는 상공업자의 역할을 정당화했으며, 이는 장 칼뱅에 의해 정리된다. 루터의 직업윤리는 현실직업에 성실한 것이 도덕적인 실천내용의 최고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정신과 프로테스탄트윤리}의 저자 막스 베버는 이른바 세속적 향락을 배척하고 합리적인 이윤의 획득을 소명으로 삼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형태를 "자본주의정신"이라 칭한바 있다. 이것이 서양근대에 나타난 자본주의정신이며, 그 계기를 신교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엄격한 시민적인 생활관과 윤리관을 지닌 부단히 향상하려는 중산계급에 의해 창조된 정신이다. 금욕, 절제, 근면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이는 시민적인 직업관이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한 인물인데, "예정설", 즉 "신이 어떤 인간을 은총으로 예정했다. 이 증거는 세속생활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의해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루터에서 캘빈으로 이어진 이러한 사상은 종교가 영리활동을 합리화/정당화 해놓은 것이었던 반면, 현 세계의 재산불평등과 차별을 신의 섭리로 돌리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Weber의 주장대로라면) 칼뱅을 거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이어진 직업의식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도 하나, 동시에 농민적 생활을 찬양하면서 상업과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불평등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며, 농노제는 사회에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이는 건설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루터는 아직 중세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타락상을 극복하기 위해 초기 기독교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권위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이완되는 것을 반발한 것이다.
R.H.Tawney는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란 책에서 Weber의 <자본주의정신과 프로테스탄트윤리>를 전면 비판하고 있다. 루터, 칼뱅 등의 Purtitanism은 결코 근대적이 않았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정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자기적응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일으키는데 프로테스탄트윤리가 강장제 역할을 했으나,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 Martin Luther와 농민들의 생각의 차이

Luther는 순수한 종교적 입장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었지, 개혁가나 혁명가적 입장에서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교의적․성서적․신학적 측면에서 면죄부 판매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요구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회 경제적 입장에서 자신들에 대한 로마교황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Luther의 종교개혁을 해방운동과 결부시키게 된다.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 교황권이나 교회의 계층제 자체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는 훗날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Luther가 농민들을 두고 "폭도"라고 불렀던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Luther는, 인간의 구제는가톨릭교회가 명한 은총을 획득하기 위한 외적행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식적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 신앙을 더 중요시하였다(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져야함). 반교황파의 인문주의자들이 Luther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은 속도가 빨라졌으며 Luther는 독일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제 교회와 신앙 개혁운농의 강령이랄 수 있는 세 가지 논문을 발표한다.


  <독일국민의 기독교적 귀족에 대한 호소> ; Luther의 종교개혁의 발전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님.
  <교회의 바빌론 유수> :
  <기독교인의 자유> : 세속적 권력으로서 교회권력부정(중세적 사상) 영방군주와 결탁, 영방군주에 귀속,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았으나, 영방군주에게 얽혀 매임. 국민적 영웅에서 이기적 권력정책의 도구가 됨. 점점 독일농민들과 멀어지게 된다.("정치세력과 종교개혁의 결탁")
‘기독교인의 자유’에 나타나는 두 가지 모순  -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 "모든 것에 종사하는 하복으로 누구에게나 종속한다."

이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을 한편으로는 영적 정신적 존재로 내적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 육체적 외적 인간이라는 의미,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이원적 인간관" 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자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외적 행위로써가 아니라 내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 때문에 국민의 영웅으로서 추앙 받는 면과 정치적 도구화라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루터의 보수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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