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서커스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4. 24. 11:19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서커스>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직 십대였을 때,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기 위해 매표소에 줄을 서 있었다. 표를 산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매표소와 우리 사이에는 한 가족 밖에 남지 않았다. 그 가족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대식구였다. 그들은 분명히 부자는 아닌 듯 해 보였지만, 입고 있는 옷은 비싸지는 않아도 깨끗했고, 아이들의 행동에는 기품이 있었다.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서 부모 뒤에 손을 잡고 서서 그날 밤 구경하게 될 피에로와 코끼리, 그리고 온갖 곡예들에 대해 흥분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전에는 한 번도 서커스를 구경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맨 앞줄에 서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으로 보아 서로를 자랑스러운 가장과 부인으로 존경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매표소의 직원이 남자에게 몇 장의 표를 원하느냐? 고 물었다. 남자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랑하듯이 말했다.

"우리 온 가족이 서커스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어린이표 여덟 장과 어른 표 두 장을 주십시오."

여직원이 입장료를 말했다. 그 순간 아이들의 어머니는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남자는 매표소 창구에 몸을 숙이고 다시 물었다. "방금 얼마라고 했소?" 매표소 여직원이 다시 금액을 말했다. 남자는 그만큼의 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것인가. 한껏 기대에 부푼 아이들에게 이제 와서 서커스를 구경할 돈이 모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때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의 아버지가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몸을 굽혀 그것을 다시 주워들더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시오, 선생. 방금 당신의 호주머니에서 이것이 떨어졌소."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결코 남의 적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절망적이고 당혹스러운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내밀어 준 도움의 손실은 실로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남자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폐를 꼭 움켜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선생. 이것은 나와 내 가족에게 정말로 큰 선물이 될 것이오."

남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들은 곧 표를 사갖고 서커스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버지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당시 우리 집 역시 전혀 부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밤 서커스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은 결코 허전하지 않았다.”


.......


어떠셨는지요? 그저 듣기에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보다 그날 밤 아버지의 행동이 일생동안 대단히 큰 의미로 남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아마 그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사회에 나아가 얻은 처세술이나, 혹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그에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활교육이란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기도를 해도, 교회에 잘 나가도, 그의 삶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보여 지지 않는다면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아무리 가정에서 사회에서 존경받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이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교육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그저 허공에 뜬 잔소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05.Mai.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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