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타이완 이야기

2013/09/09

행복나무 Glücksbaum 2013. 9. 2. 16:17

샬롬!

어느 해보다 무더웠다고 하는 여름도 이제는 한풀 꺾였다는 한국 소식을 듣습니다. 이곳 대만은 15호 태풍 콩레이가 지나간 후 여러 날 중남부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88수해가 있었는데, 금년에는 829 수해가 닥쳤습니다. 88수해는 직접적인 태풍의 영향으로 인한 피해였던 반면, 금년 8월 29일 이후 연일 내린 비로 인한 수해는 태풍이 지나간 후 대기 중에 남아 있던 습기로 인해 발생한 폭우 때문에 입은 피해인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원인이야 어쨌든 많은 비로 인해 산사태가 나고 농경지와 많은 주택이 물에 잠긴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태풍을 직접 맞은 것이 아니어서인지 88수해 때에 비해 피해가 적은 편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

이곳 뉴스에서는 산사태로 굴러 떨어지는 큰 바위에 깔려 죽을 뻔한 한 운전자의 이야기가 뒤차에서 찍은 동영상과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많은 토사와 함께 거대한 바위가 자동차를 향해 떨어졌지만 다행히 차를 덮치지 않고 차 바로 옆에서 멈춰 섰습니다. 자동차는 함께 떨어진 다른 돌들 때문에 크게 부서졌지만, 운전자는 무사히 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17호 태풍 도라지는 한국과 일본을 지날 것 같은데, 경로가 바뀌어 한국을 비껴가거나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8월중에 보름간 캐나다를 다녀왔습니다. 작은 딸 남녕이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방학을 이용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녕이는 8월로 결혼날짜를 잡았습니다. 저에게는 첫 번째 캐나다 방문이요, 첫 번째 아메리카 대륙 방문이었습니다. TV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쉽게도 훌쩍 미국으로 날아가곤 하던데(그런 장면을 볼 때면 저는 '저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뭘 먹고 사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작가들에게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저는 여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딜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 방문은 내 아이가 다 자라 결혼을 하는 자리에 참석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14년 전 한국인도 거의 살지 않고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 중부 리자이나에 달랑 두 아이만 비행기를 태워 보낸 후 첫 방문이라는 점에서 저에게 남다른 감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14년 반의 시간 동안 아내만 단 한 번 아이들을 찾아가 한 달쯤 보살펴 주고 왔을 뿐, 우리는 아이들을 직접 보살필 수 없었고,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입학식, 졸업식 때도 전화로 혹은 이메일로 축하하는 게 고작이어서 두 자매가 서로 축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비행기 표를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1년 혹은 2년에 한 번 한국에서 만나는 게 고작이었고, 졸업 후에는 직장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역시 1, 2년에 한 번 한국이나 대만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전화 통화도 하고, 영상통화도 하긴 하지만, 서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는 것과는 그 느낌이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학교에 다니던 때 "캐나다에 온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 우리가 제일 가난한 것 같아"라며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불평을 할 때면, "유학을 갔다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이미 특혜를 누리고 있는 거야"라며 아이들 입을 막았지만, 사실은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와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직접 보살펴줄 수 없었기 때문에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늘 엄마 역할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큰 아이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일을 담대하게 스스로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빼앗아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 고등학교 생활을 잘 마칠 수 있게 해 주셨고, 대학에도 진학하게 해 주셨으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년 실업 문제가 있는 캐나다에서 졸업 후에는 바로 직장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간섭이 없어 흐트러지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이가 먼저이긴 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룰 수 있기까지 인도해 주셨으니, 정말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위는 캘거리 한인교회 장로님의 차남입니다. 두 가정 모두 작은 아이들이 먼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결혼을 한 작은 아이는 캘거리에 살고 있고, 큰 아이는 에드먼턴에 살고 있습니다. 같은 앨버타 주에 있지만 차로 3시간 거리여서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그래도 맘만 먹으면 왕래할 수 있는 거리이니 서로에게 의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결혼식에도 우리가 가기 전에 큰 아이가 여러 가지 준비를 다 마쳐놓았고, 정작 바빴어야 할 우리 부부는 달랑 결혼식에 얼굴만 비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딸 결혼시키는 부모지, 하객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방학이라 그래도 보름간의 휴가를 낼 수 있었고,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보낸 지 처음으로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이 장성해서 아이들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구경도 다닐 수 있었으니 호사를 누린 셈입니다.

“우리가 인류를 위해 무슨 위대하고 급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 얼굴도 못보고 살아야 하니? 앞으론 그러지 말자” 라고 아내는 말을 했지만, 여태 생각이 없어서 못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러니 말은 ‘앞으론 그러지 말자’ 라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장성하면 품에서 내놓아야 하는 거야 정한 이치이지만, 너무 일찍 내놓아야 했던 점, 그리고 너무 멀리 떨어뜨려 놓아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점은 특히 엄마인 아내에게는 마음의 큰 짐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야 큰 맘 먹으면 찾아가 만날 수 있지만,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그럴 수 없었던 남북 이산가족들이나, 먼 타국 허허벌판에 강제 이주되어 객으로 살아야 했던 많은 조선족의 한은 얼마나 깊을까 하는 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휴가를 마치고 이제는 대만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더위를 걱정했지만, 계속 내린 비 덕분에 기온이 많이 떨어져 있어 재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학교는 다음 주 월요일에 새 학년 강의가 시작됩니다. 대만에 온 지도 5년이 지나 이제는 타성에 젖어 조금은 나태해지려고 하는 걸 스스로 느낍니다.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다그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년 3월이면 두 번째 임기가 끝이 납니다. 대만장로교회 및 창롱대학과의 계약이 갱신되어서 다시 3년을 더 대만에 있게 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곳으로 인도하실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론 불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속히 갈 길을 보여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늘 기억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받은 사랑에 부응하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삶의 모든 국면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늘 넘치시기를 기도드리면서,

 

 

2013년 9월 2일,

 

대만에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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