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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짚어본 "유엔등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거의 기본값이었다.
하도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들다보니 사람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타고난 공동운명체로 보았다.
지금 견돈굥가도 이걸 바랬는데 파토 직전에 몰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은 유대국가에 미지근했다. 본문에도 인용했지만 나치의 분위기가 심상찮자 독일 유대인 937명이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을 때, 쿠바는 접안 및 상륙을 거부했다. 선수를 플로리다로 돌려 마이애미에 내리려 했을 때 미국은 거부했다. 바다를 떠돌다가 캐나다도 거부하자 이 배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돌아갔다. 후일 승선객 3분의 1일 홀로코스트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핍박당하는 청교도들이 찾았던 자유의 땅이 파시즘 학살의 기운을 느끼고 피해온 이들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시독교가 주류인 미국 역시 유럽 그리스도교 신-구교회의 반유대주의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냉전이 막 시작되던 즈음, 아랍이 반대하는 이스라엘을 지지했다가 일어날 후폭풍이 부담이었다. 1945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우디의 국왕을 수에즈에서 만났다. 역사적인 퀸시함상 회담을 통해 아랍 석유를 공급받고, 미국이 안보를 지원하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루스벨트는 재임기간 유태국가에 대한 어떠한 지지 메시지를 보낸적이 없었다. 관련하여 쏟아지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항상 유보했다. 그도 내심 이스라엘 건국 승인으로 인해 사우디와 중동국가들과의 관계를 망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나라가 가깝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부침이 있었다. 특히 1948년초 이스라엘 건국 조짐이 무르익을 때, 2차대전 승전국이자 국제사회를 선도할 미국 정부에는 이스라엘 승인을 반대하는 전략가들이 많았다. 특히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부의 반이스라엘 정서는 유명했다. 마셜 국무장관과 봉쇄정책 설계자로 유명한 조지 케난이 대표적이다. 백악관에서는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었다. 국무부 대 백악관 참모들간의 싸움이었다. 결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건국 당일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하게 된다. 만일 침례교도이자 기독교 시온주의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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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스라엘 관계는 특수하다. 유엔등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거의 기본값이었다. 학계나 언론계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되곤 했으나, 적어도 정부 단위에서는 이스라엘 문제는 늘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일종의 금기이기도 했다.
하도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들다보니 사람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타고난 공동운명체로 보았다. 아예 저 두 나라는 애초부터 DNA 상 거의 한 나라에 가깝다고 인식했다.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2차대전 전, 미국은 유대국가에 미지근했다. 본문에도 인용했지만 나치의 분위기가 심상찮자 독일 유태인 937명이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을 때, 쿠바는 접안 및 상륙을 거부했다. 선수를 플로리다로 돌려 마이애미에 내리려 했을 때 미국은 거부했다. 바다를 떠돌다가 캐나다도 거부하자 이 배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돌아갔다. 후일 승선객 3분의 1일 홀로코스트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핍박당하는 청교도들이 찾았던 자유의 땅이 파시즘 학살의 기운을 느끼고 피해온 이들을 거부한 것이다.
기독교가 주류인 미국 역시 유럽 기독교의 반유대주의 (안티세미티즘)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복음주의 일부 진영 중 기독교이면서도 시온주의 사상을 접목시킨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을 싫어하는 이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나라를 만든다니 마냥 지원하기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특히 냉전이 막 시작되던 즈음, 아랍이 반대하는 이스라엘을 지지했다가 일어날 후폭풍이 부담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불과 3년전인 1945년 발렌타인데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우디의 이븐사우드 국왕을 수에즈에서 만났다. 역사적인 퀸시함상 회담을 통해 아랍 석유를 공급받고, 미국이 안보를 지원하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루스벨트는 재임기간 유태국가에 대한 어떠한 지지 메시지를 보낸적이 없었다. 관련하여 쏟아지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항상 유보했다. 그도 내심 이스라엘 건국 승인으로 인해 사우디와 중동국가들과의 관계를 망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나라가 가깝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부침이 있었다. 특히 1948년초 이스라엘 건국 조짐이 무르익을 때, 2차대전 승전국이자 국제사회를 선도할 미국 정부에는 이스라엘 승인을 반대하는 전략가들이 많았다. 특히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부의 반이스라엘 정서는 유명했다. 마셜 국무장관과 봉쇄정책 설계자로 유명한 조지 케난이 대표적이다. 백악관에서는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었다. 국무부 대 백악관 참모들간의 싸움이었다. 결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건국 당일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하게 된다.
만일 침례교도이자 기독교 시온주의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트루먼은 이스라엘에게는 갑툭튀 영웅이다. 6년전 히브리대학에서 연구를 수행할 때 트루먼 연구소로 출근했었다. 유태교와 어떠한 인연이 없음에도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신이 준비한 미국 대통령이라고까지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루즈벨트도, 트루먼의 후임인 아이젠하워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케네디도 다 이스라엘보다는 아랍과 잘 지내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었기 때문이다.
미국없이는 안보와 생존이 불가능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미국 대통령의 이스라엘 거리두기가 부담이었다. 메나헴 베긴 총리는 이츠하크 라빈을 미국 대사로 보내면서 독특한 공공외교 프로젝트를 주문했다. 한마디로 유대-기독교 (Judaeo-Chritian) 정체성을 바탕으로 두 나라를 종교 기반의 공동운명체로 묶는 대중 인식 고양이었다.
라빈 대사 당시 미국 유명 복음주의 목사, 신학자, 교계 주요 인사들이 쉴새 없이 이스라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극진한 대접과 이어지는 세미나를 통해 약속의 땅 이스라엘은 기독교와 한 길을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아이러니랄까? 이 설계를 주도한 이들은 대개 세속주의자들, 즉 유대교인들이 아니었다. 유대교 전통은 따르지만 정통 신앙과 교리를 따르는 정치인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종교 정체성 기반 공공외교에 진력한 것이다. '유대-기독교 연대' (Judaeo-Christian coalition)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통령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변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미국민들만큼은 이스라엘과 한편이며, 기독교의 형제로 의당 이스라엘을 지켜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 이 프로젝트가 점차 먹혀들어가는 징후가 나타났다. 미국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여기에 미국내 유대인 디아스포라 출신 핵심 정관계, 재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백악관과 국무부 등을 설득하는 네트워크가 가동된다. 이 때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이스라엘이 미국을 동맹으로 만들기 위해, 아니 미국에게 버려질 수 없는 나라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전략을 세우고, 입체적으로 접근했는지 놀라게 된다. 비록 중동문제에 이스라엘은 빌런 노릇을 한 적이 많지만, 적어도 국가 생존을 위해 강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기경해나간 전략과 행동만큼은 감탄하게 된다.
동맹은 첨단 자동차의 오토파일럿이나 자율주행이 아니다. 마치 쉴새없이 페달을 밟고, 균형을 잡아내야 하는 자전거 주행에 가깝다. 잠시라도 관리에 실패하면 비틀거리게 된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그리 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임명때 이스라엘과 유태인 디아스포라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게되면 놀라고 또 놀란다. 트럼프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요새 이스라엘의 대미 동맹관리는 이전같지 않다. 물론 미국의 변화도 큰 변수다. 더 이상 과거같은 커미트먼트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이렇게까지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며 관계 악화를 감수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백번 대답해도 하마스의 만행이고 이스라엘은 자위권 차원에서의 보복공격이 정당했다. 그러나 하마스 척결과 별개로 민간인들 피해가 양산되는 상황까지 양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이 죽었다. 이스라엘은 선을 넘었고, 미국은 이 상황을 막아야 되는 코너에 몰렸는데... 이스라엘 극우 각료들은 자꾸 선을 더 넘는다. 급기야 북쪽에서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한 이들을 지원해야 할 라파 루트를 미국이 공들여 세팅했는데, 이스라엘은 여기를 세게 때리겠단다. 140만 피난민도 있지만 그 가운데 하마스 등 불순분자도 있기 때문에 라파를 사람들이 드나들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거다. 워싱턴이 열받을만하다.
결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슈머 의원이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교체 희망을 운위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일이다. 유태인들의 선거 보복이 무서워 미국 정치인들은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이 나왔고, 바이든 대통령은 척 슈머의 이 발언을 지지했다.
한마디로 미국내 일반 대중들도 여론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같지 않다. 국제 관여에 지친 미국 여론의 변화도 한 몫했지만, 이스라엘의 흑화가 더 큰 일이다. 아무리 하마스 요원들을 다 사살하고, 거점을 파괴해도 너무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감수한다면, 결국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데.
이스라엘 선배 정치인들이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네타냐후 정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동맹이 아닌데... 뭔가 착각하는 듯 하다. 미국은 전시 내각의 핵심 베니 간츠 국방장관을 워싱턴으로 부를 기세다. 그는 네타냐후의 정치적 라이벌이다. 네타냐후는 부르지 않고, 일종의 정적을 워싱턴으로 부르는 모양새는 영 어색하다.
국제정치가 늘 변화하고, 출렁거려도 가장 안바뀔만했던 미-이스라엘관계까지 삐걱거리는 걸 보니 세상이 진짜 요동치고 있구나 싶다.
덧. 그렇다고 두 나라가 공개적으로 크게 충돌하지는 않을거고, 곧 화해의 포옹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 지도자들간의 화해 가능성과는 별개로, 이미 이스라엘의 폭력적 이미지에 미국 내 민주당 지지자들의 염증과 혐오가 늘고 있다. 미국 정계는 또 이를 반영한 자리잡기를 해야하기에 더 강경해질 수도 있다. 양국관계에 심각하게 악영향을 미치는 위기신호다.
글, 인 0식
[24. 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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